나는 원불교학과 2학년이 돼서 대산종사에 대한 신심이 확실히 서졌다.

대산종사의 녹취법문을 손글씨로 정리한 수필법문을 접하게 됐다. 법문이 너무 좋아서 법문이 나오면 무조건 복사해 읽었다. 참 행복했다.

지금으로부터 30여년 전이니 복사비도 꽤 나갔을 것이다. 그러나 돈하고는 비교 할 수 없는 큰 얻음이 있었다. 나의 영생을 맡길 수 있는 스승들을 모시게 된 계기가 된 것이다.

대산종사의 법문을 읽으면서 대산종사는 대종사와 정산종사와 두 분이 아님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항상 대종사와 정산종사를 모시고 사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면서 대산종사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가질 수 있었다.

내가 원불교학과에 다닐 때 대산종사는 원평교당에 오래 머물렀다. 나는 시간이 나면 원평에 대산종사를 배알하러 가곤 했다. 4학년 때 기숙사에서 같은 방 실원이 4명이었다. 어느 날 작은 갈등이 생겨서 실원 중 1명이 다른 실원들에게 말을 하지 않았다. 그것을 풀기 위한 방안으로 며칠 후, 방 식구들이 대산종사를 배알하러 가게 됐다.

어찌어찌 하여 모든 실원들이 한 마음이 돼 원평교당에 정양하는 대산종사를 뵙게 됐고, 대산종사는 우리들과 함께 사진을 찍어줬다. 복잡하던 우리들 마음은 눈 녹듯 녹아내렸다. 대산종사를 뵙기만 해도 우리들 마음이 치유가 됐다.

원불교학과를 졸업하고, 훈련교무 1년을 보내는 중, 완도에서 1개월간 대산종사를 모시고 훈증을 받는 시간이 있었다. 더운 여름에 낮에는 비록 땀 흘리며 작업을 했지만, 야단법석이 열리는 자리에 앉아 시원한 수박 한 조각 먹으면서 법문을 받들면 다시 없는 극락생활이 됐다.

어느 날 동창교무와 셋이 함께 서서 이야기 하고 있는데, 우리를 본 대산종사는 "너희들 똑같이 생겼다. 사진 찍자"했다. 우리 세 사람은 모두 안경 쓰고, 얼굴은 동글 납작 하고, 키도 고만 고만 했다. 말씀을 듣고 보니 우리는 정말 비슷하게 생겼다. 웃으며 우리는 함께 사진을 찍었다.

교무가 되고 첫 근무지가 원평교당이었다. 원평에 근무하던 첫 해, 대산종사는 후반기 4개월간 교당과 구릿골에서 정양했고 많은 사람들과 만났다.

그해 이후로 많이 편찮으셨다. 그래서 그해에는 손님 접견을 조금밖에 못했다. 하지만 가까이 계셨기에 많이 뵐 수 있었다. 그냥 뵙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고 좋았다. 어쩌다 대산종사를 모시고 손을 잡고 산책을 할 때면 너무 즐거웠다.

대산종사가 원평교당을 떠난 후에도 주임교무인 이양신 교무는 왕궁에 머무는 대산종사를 자주 찾아갔기에 나도 덕분에 뵐 수 있었고 모두가 은혜로운 나날이었다.

나는 어디서 살던지 그곳이 나의 인생에
제일 좋은 곳이고 좋은 때이다.

내가 교화훈련부에 근무할 때 대산종사가 열반했다. 열반하기 몇주 전, 꿈속에서 여러 가지 물건들을 보여주며 선물을 하나 고르라고 했다. 나는 그중에 하나를 골랐다. 그런데 선물을 받으면서도 꿈속에서 나는 슬픈 생각이 들었다. 대산종사가 열반을 준비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얼마 후 열반에 드는 대산종사를 가슴 아프게 가까이에서 지켜보게 됐다. 비록 대산종사의 색신은 갔지만 법신은 늘 나와 함께 하리라 생각한다.

대산종사가 일생을 두 분 스승을 받들고 살았던 것처럼 나도 세 분 스승을 일생을, 영생을 통해 모시며 살고 싶다.

또한 대산종사는 "나는 어디서 살던지 그 곳이 나의 일생에 제일 좋은 곳이고 좋은 때이다. 내가 진영 있을 때는 그 때가 제일 보람 있는 때였고, 원평이나 양주에서 요양할 때는 그 때 그 곳이 제일 좋은 곳이었다. 아마 죽으면 죽은 그 상태가 제일 좋을 것이다"고 법문했는데, 나도 그렇게 죽을 때까지 살고 싶다.

광주한방병원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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