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성하 교무 / 샌프란시스코교당
처음에는 이것이 문화적 차이요, 동서양인 기질의 차이인가 싶었으나 요사이 생각할수록 이것은 오히려 우리 시대의 삶의 모습인 듯하다.

비정규직, 계약직이 난무한 이 불확실의 시대에 누구든 지금 이 곳이 영원한 보금자리일 수가 없고 유목민처럼 새로운 목초지를 향해 언제든 떠날 준비가 돼 있어야 하는 상황이다. 그러니 차분하게 한 자리에 마음을 내려놓고 엉덩이를 붙이는 일은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다. 농경민의 유전자를 지닌 교무가 유목민들을 교화하자니 교무 스스로 마음을 새로이 갖지 않고서는 만성적인 교화 무력감에 시달리지 않을 수 없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차분하게 법회에 한 자리를 차지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지만 그들은 필요에 따른 시절의 관계를 맺을 뿐이다.

샌프란시스코에 와서 만난 현지의 인연들은 다들 우연히 젊었고, 모두들 직업을 찾아 캔자스에서, 아이다호에서, 브라질에서, 호주에서 이사 온 사람들이었다. 당연히 언제든 더 나은 조건과 영원한 정착지를 찾아서 어디로든 움직일 준비가 되어 있는 유목민 같은 사람들이다.

사실 안착을 할래야 샌프란시스코처럼 물가와 집값이 비싼 곳은 젊은이들이 여간해서는 안착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다보니 공들여 인간관계가 겨우 만들어질까 싶으면 떠나 버리고 상황은 번번이 초기화가 된다. 구글, 페이스북, 트위터, 애플 등 전세계 적으로 유명한 IT 산업들이 즐비한 샌호세와 더불어 전 세계의 젊은 인력들을 끌어당기는 샌프란시스코의 경제 문화적 매력은 차고 넘치지만 대세는 역시나 쉬지 않는 변화와 흐름 속에서 도시가 굴러가고 있다. '언제쯤이면 법당이 현지인으로 가득 찰까, 언젠가는 내가 이 법당을 가득 채워야지'하는 이런 교화의 다짐과 화두 역시 이 흐름의 대세 속에서 거듭나야 하는 것 아닌가 싶다. 말하자면 정착과 안정을 지향하기 보다는 사람이 계속 밀려오고 밀려가며 변화와 발전을 지향하는 이 도시에서는, 인연을 붙들기 보다는 흐름에 맞추어 그 때 그 때 더 많은 새로운 인연을 계속하여 만나는 것이 오히려 바람직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며칠 전에는 칠레에서 왔다는 청년이 명상에 대해 관심이 있다며 교당에 들러 선방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갔다. 영어를 배우러 왔고 앞으로 3개월 후에 돌아간다고 하는데 그 사이에 그 친구는 샌프란시스코에서 할 수 있는 경험은 다 하고 싶은 것이다. 어제는 한국에서 온 학생 손님이 축구를 하고 싶다 하여 인터넷으로 축구 동호회를 찾아 갔더니 주최자부터 시작하여 모여든 스물두명 중 어느 누구 하나 샌프란시스코 토박이도 미국 토박이도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미국에서 비인기 종목인 축구여서 인지 모여든 사람은 유럽인, 중동인, 남미인, 소수의 아시안들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서로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지라 경기 내내 최소한의 짧은 단어들로 서로 얘기를 할 뿐 그 외에는 불필요한 아우성도 없이 과묵하고 조용하게 경기를 하는 것이었다. 샌프란시스코의 다양한 인구 분포와 단기 여행자가 많은 모습을 보여주는 광경이었던 것 같다.

교당 현관문을 열고나서면 태평양 앞바다가 한 눈에 들어온다. 특히 교당 앞바다는 파도가 제법 높은 편이라 서핑을 즐기는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다.

'잠시도 쉬지 않고 바다가 일렁이며 파도를 만들어내니 저 바다에 낚싯대를 드리웠을 때 낚시 바늘은 늘 새로운 파도를 만나겠지. 여전히 같은 물이지만 언제나 새로운 파도가 낚싯대를 건드릴 것이고, 저 넓은 바다 크기만큼 많은 물고기들이 낚시 바늘 주변을 지나가거나 바늘에 걸려들겠지' 그런 심정으로, 태평양 앞바다에 낚싯대를 드리운 심정으로 교화를 하는 중이다.

대어도 걸릴 것이고, 피라미도 걸릴 것이고, 바다가 넓은 만큼 물고기도 무수할 것이다. 늘 새로운 파도를 만나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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