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도는 원융(圓融)하여 유와 무가 둘이 아니요, 이(理)와 사(事)가 둘이 아니며, 생과 사가 둘이 아니요, 동과 정이 둘이 아니니, 둘 아닌 이 문에는 포함하지 아니한 바가 없나니라."

4장은 큰 도는 원융하여 유와 무가 불이문이라는 말씀이다. '원융하다'는 것은 원만하여 걸림이 없다는 뜻이요. 유와 무가 둘이 아니다는 것은 현상은 다르나 본질이 같다는 말이다. 봄 여름에 무성했던 잎이 겨울이 되면 다 떨어지는데 이는 유에서 무로 변화하는 과정이다. 분명히 무성했던 나뭇잎과 잎이 다 떨어진 나무는 현상적으로 볼 때 완전 다르다. 그러나 잎이 없는 나무는 이듬해 봄이 되면 다시 새잎이 나와 다시 무성해지고 다시 가을이 되면 떨어지는 반복 순환을 한다.

끊임없이 유는 무로, 무는 유로 색불이공 공불이색의 무궁한 순환을 하므로 결국은 유가 곧 무요, 무가 곧 유가 되는 하나의 연속선상이 된다. 마치 동전의 앞, 뒷면이 이름을 붙여서 앞면과 뒷면이지 동전이라는 전체를 이야기할 때는 하나인 것과 같다.

유와 무도 우리의 분별심으로 나누어볼 때 둘이요, 전체로 보면 유와 무는 둘이 아니다. 유무만 그러한 것이 아니고 생과 사, 이와 사, 동과 정이 다 그러하다. 그래서 단촉한 범부의 눈에는 전체를 못보고 한편만 보기에 유와 무가 둘이요, 한발 나아가 유와 무라는 부분에 떨어져서 단촉한 시각으로 상에 고집하며 주착하여 고와 락, 죄와 복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이다.

또한 <정전> 무시선법에서 오래오래 선을 계속하여 모든 번뇌를 끊고 마음의 자유를 얻은즉 '진세에 처하되 항상 백천삼매를 얻을지라 ~(중략)~ 이것이 이른바 불이문'이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이는 원융한 큰 도가 평상심으로 나타날 때는 동정 간에 백천삼매의 경지로 나타난다는 뜻이다.

<정산종사법어> 원리편 9장에 '견성에 다섯 계단'을 밝혔다. "첫째는 만법귀일의 실체를 증거하는 것이요, 둘째는 진공의 소식을 아는 것이요, 셋째는 묘유의 진리를 보는 것이요, 넷째는 보림하는 공부를 하는 것이요, 다섯째는 대기대용으로 이를 활용함이니라." 이렇듯 성리의 단계를 확연하게 드러내 밝히고 있다. 이 원융한 큰 도는 다름 아닌 묘유의 진리이다.

'묘유'란 묘하게 있다는 것이요, 있긴 있는데 형상이 없어서 눈에 안보이고 잡을 수도 없으나 없다고 하기에는 역력하게 인과의 주체로 존재하며 만상의 조화를 나투는 밝고 밝은 신령스러운 마음이다. 이름하여 영지라고 한다. 이 영지가 모든 잡념에 물들지 않고 모든 번뇌를 여윌 때 구름 한 점 없는 달처럼 마음의 혜월이 되어 생사자유와 윤회해탈과 정토극락을 나오게 하므로 둘이 아닌 이문이 성리공부의 중요한 기점이 되는 것이다.

'큰 도는 원융하여 유와 무가 둘이 아니다'고 했다. 한마디를 첨부를 한다면 큰 도는 원융하여 둘이 아니며 능유능무하고 능동능정하다. 이 정도 되어야 묘유라 할 수 있지, 능히 화를 냈는데 감정을 거둘 힘이 없고, 능히 동했는데 고요하게 하지 못한다면 어찌 묘유라 할까?

<기흥교당>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