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산구곡로(邊山九曲路) 석립청수성(石立聽水聲) 무무역무무(無無亦無無)요 비비역비비(非非亦非非)' 변산 아홉구비 길에 돌이 우뚝 서서 물소리를 듣는구나. 없고 없으며 없다는 것 또한 없고 아니고 아니며 아니다는 것 또한 아니라네.

이 의두(疑頭) 요목은 〈대종경〉 성리품 11장 법문이다. 대종사가 9인 제자와 더불어 영산 방언과 법인성사를 이룬 후 장차 회상을 공개할 준비 차 변산에 은거하면서 관심입정(觀心入定)의 많은 성리법문을 설했다. 그 중에 가장 대표적으로 전해지는 5언절귀 시문 형태의 법문이다.

앞의 두 소절이 이 문장을 여는 서문(序文) 격이라면 '무무역무무(無無亦無無)요 비비역비비(非非亦非非)' 뒤 두 소절이 이 시문의 요체(要諦)라고 할 수 있다. 이 선시(禪詩) 한 편을 읊은 후 '이 뜻을 알면 곧 도(道)를 깨닫는 사람이라'는 부연으로 인하여 우리들의 관심은 특별하게 증폭된다. 이게 대체 무슨 내용이기에 이 뜻을 알면 도를 깨닫는 사람이라고까지 하셨을까?

대종사, 어느 겨울 선방에서 주산 송도성에게 '과거 칠불(七佛)의 전법게송을 해석하라'고 하명했다. 총명했던 주산종사가 과거 7불의 게송을 차례로 능숙하게 해석하여 마침내 제7 서가모니불에 이르렀다.

'법(法)은 본래 무법(無法)에 법하였고 무법이란 법도 또한 법이로다. 이제 무법을 부촉할 때에 법을 법하려 하니 일찍이 무엇을 법(法)할꼬'하고 새기던 중에 대종사 '그 새김을 그치라' 하고 말씀했다. '본래에 한 법이라고 이름 지을 것도 없지마는 하열한 근기를 위하사 한 법을 일렀으나, 그 한 법도 참 법은 아니니 이 게송의 참 뜻만 깨치면 천만 경전을 다 볼 것이 없으리라'하셨다. 여기서도 핵심 키워드는 무법(無法) 즉 법 없음이다. 곰곰이 살펴보면 서가모니불의 전법게송 '무법의 법'이나 대종사의 '무무역무무' 법문이 많이 닮았다. '이 뜻을 알면 도를 깨닫는 사람'이라 한 대목과 '이 게송의 참뜻을 알면 천만경전을 다 볼 것이 없다'한 대목도 그렇다.

'무실무득법(無失無得法) 잃을 것도 없고 얻을 것도 없는 법인데, 구법시실법(求法是失法) 법을 구함은 이 법을 잃음이로다. 법법본래법(法法本來法) 법이라는 법의 본래의 법은 무법무비법(無法無非法) 법도 아니요 법 아님도 아니로다.' 이는 대산종사의 게송이다. 서가모니불의 전법게송과 대종사의 무무역무무 게송을 이어받아 대구(對句)한 느낌이 있다. 세 분의 말씀이 조금씩 다른 느낌을 주지만 내면을 들여다보면 한 줄기 물길 같다. 심월상조(心月相照)의 법맥이 진하게 느껴져 전해진다.

문제는 무(無)다. 수천년 세월을 전해온 무(無)자 화두다.
오는 잠을 참고 애써 앉아 있는 것만이 대정진이 아니고, 아픈 다리를 참고 애써 앉아 있는 것만이 대적공이 아니다.

사구(死句)를 품고 천만가지 사량을 동원하여 대조하고 헤아린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다. 사량으로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말도 글도 생각도 내려놓아야지. 다만 '없고 없고 없다 하는 것도 또한 없는' 내면의 참 성품)을 묵묵히 비추어 지켜볼 따름이다. 종교의 문에 성리를 밝힌 바가 없으면 원만한 도가 아니라고 했다. 왜냐하면 성리는 모든 법의 조종(祖宗)이 되고 모든 이치의 바탕이 되는 까닭이다.

만법이 무법(無法)에 뿌리 하였고 무법이 천만 사리의 근원처이자 통일체(統一體)다. 여기에 짐작되는 바가 없으면 수행은 오렴수에 머물고 마음공부는 때를 벗어나기 힘들다. 개교 100년을 앞두고 우리 수행문화에 집중적인 점검이 필요한 때다. 그것이 자신성업봉찬의 요체라고 감히 말한다면 내 오만함일까?

<경남교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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