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추대의로 일관한 삶

쌀 한 톨, 나무 한 토막은 물론 공가의 물건을 금쪽같이 아끼며 공익정신을 일깨워준 공도의 주인. 불석신명불공(不惜身命佛供), 금욕난행불공(禁慾難行佛供), 희사만행불공(喜捨萬行佛供)으로 일관한 공부인. 법통을 목숨보다 중히 여기며 종명과 공명에 따르고, 사불범정(邪不犯正)의 대의로 취사의 모범을 보인 형타원 오종태(亨陀圓 吳宗泰, 1913~1976) 대봉도.

그는 진안군 마령면 사람으로 일찍이 소태산대종사를 뵙고 귀의한 부모의 연원으로 18세 되던 원기15년에 입교를 하고 총부로와 입선했다. 그러나 초창기 총부의 사정은 학비를 주면서 공부를 시킬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함께 입선한 7,8명의 동지는 전주와 이리에 있는 제사공장과 고무공장 등에서 학비를 벌어야했던 몇 안 되는 선진이었다.

이런 모습을 본 대산종사는 대종사께 "영산 토지를 매매하면 상당한 재원을 마련할 수 있으니 고생을 시키지 말고 교육의 문호를 열어 주는 것이 좋겠다"고 건의했다. 그러자 대종사께서는"나도 안다. 교단의 첫 기초를 세우려면 신맥등 모든 기운을 보기 위한 시범이다. 이 사람들이 앞으로 교단의 동량이 될 것이다. 두고 보라"며 말씀했다. 실제로 초창당시 공장을 다니며 신성을 바친 선진들은 우리 회상의 뿌리가 됐다.

이처럼 우리 회상의 뿌리가 된 선진들을 대산종사는 "그 분들이 우리회상을 지킨 조강지처(糟糠之妻)요, 진리의 조강지처이기에 잘 받들어야 우리 회상의 만대를 이을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이렇게 학원생활을 마치고 원기20년 부산 남부민교당 서기로 교화 일선에 첫 발을 내딛었다. 이후 초량·당리·도양·수계·중길리·용암·봉동·장수 등 주로 어려움이 많은 농촌교당에서 한 사람이라도 제도의 문에 들게 하기 위해서 혼신을 다해 교화활동을 펼쳤다. 용암교당 봉직 중에 6·25를 만났다. 무고한 트집으로 감금을 당하자 오직 기도일념으로 대처했다.

그러자 모든 일이 사실로 드러나 4일 만에 석방이 됐다. 이때 심고와 기도의 위력을 더욱 실감하고 더 정진 하는 계기가 됐다.

교역 후기에는 감찰원 부원장, 총부순교감, 영산선원장 등으로 봉직했다. 순교감으로 재직시엔 문학적 소양이 풍부한 그는 유연한 말과 풍성한 표현으로 교법을 알기 쉽게 설해 많은 사람들에게 깨달음의 기쁨을 주었다. 그는 언제나 교리의 근본정신을 선명하게 밝혀주었고, 법통을 생명과 같이 여기며 종명과 공명에는 절대적으로 따랐다.

특히 시비와 대의가 분명한 취사력은 결코 불의가 범접할 수 없었다.

원기54년부터 근무한 마지막 일터였던 영산선원에서의 생활은 일생을 통해 익힌 신성과 공심, 대의정신을 자라는 후진들에게 온통 다 전하는 시기였다. 이때 영산선원의 발전은 물론 지역사회 발전에 끼친 공로를 인정 받아 5·16민족상 사회부문 장려상을 받았다.

대산종사는 열반법문을 통해 "일관된 신성으로 46개성상을 물도, 불도 무서워하지 않는 심법으로 교단의 천추대의(千秋大義)를 살려 준 일생으로 하늘도 원망치 않고, 사람도 원망치 않아서 위법망구 위공망사한 거룩한 일생이었다"고 추모했다.

그는 열반을 앞두고 "생사는 여행이요, 옷 갈아입는 것이니 푹 쉬었다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진리의 훈풍을 타고 적멸궁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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