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모시게 될 날 늘 염원

▲ 이정선 교무/원요양병원
'세월이 흐르면 좀 나아지려나?' 했는데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대산종사를 생각하면 가슴앓이를 하곤 한다. 조실 방에 들어서면 "정선이 왔냐!"하던 다정한 성음이 아직도 쟁쟁하다.

학생 때였을까? 아니면 그 이전이었을까? 대산종사를 뵙기 전 부처의 법문을 들으면 '왜 나는 그 시절 그 자리에서 직접 제자로 모시고 사는 복이 없었을까?' 또한 9인 선진을 생각하면 '왜 나는 그 때 태어나서 대종사를 직접 뵙는 복이 없었을까?'하는 생각을 참 많이 했다. 그랬는데 대산종사를 뵙고 난 후에는 부처를 가까이에서 모실 수 있다는 충만감에 아무 것도 부러운 것 없는 생활을 하게 됐다.

대산종사는 누구에게나 가슴 가득 만족감을 줬다. 내가 무슨 능력이 있어서 간호를 담당한 것이 아니었다. 당신께서 어디가 아프면 "내가 무슨 주사를 한번 맞아 볼까나"하고 내가 처방을 할 수 있도록 유도를 했다. 지금 생각하면 우리의 능력이 모자라면 당신이 나머지를 채워 100% 활용되도록 했고, 그 사람이 그 일을 여한 없이 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줬다. 그래서 내가 맡은 일에 대해 큰 보람을 가지고 사명을 다할 수 있게 했다. 한 사람도 무능한 사람이 없이 제 할 일을 할 수 있도록 모두를 살려 쓰는 자비를 베풀었으니 활불 조불의 담당으로 온 부처의 역할을 다하셨다. 대산종사를 생각하면 우리들과 다른 세계에 사는 분이라 높고 고고하기만 할 것 같아 어렵게만 생각했는데, 얼마나 소탈하시고 유머러스한지!

하루는 훈련교무 시절 수계농원에서 훈련을 받다가 조실에서 부르면 들어가 주사를 놓아드리며 "종법사님! 수계농원에는요, 앵두가 빨갛고 맛있게 열렸는데요, 지나가면서 하나씩 따 먹기도 하거든요. 그런데 근산 법사가 손도 못 대게 하네요. 한꺼번에 따서 다 같이 먹어야 한다고 하면서요" 그랬더니 빙그레 웃으시면서 "야! 손을 못 대게 하면 입을 대지 그랬냐"고 말해 얼마나 웃었는지….

사람이 믿음과 존경의 극치에 이르면 자신의 목숨조차 아깝지 않은 것이 우리 9인 선진들이 대종사의 한 말씀에 목숨을 던져 혈인의 이적을 나툰 것처럼 대산종사도 그러했다.

하루는 박은국 원로교무를 뵙는 시간에 자연스럽게 대산종사에 대한 말씀이 오고가는 중 "대산종사는 인간적인 면에서도 참 행복한 분이네요" 했더니 "왜?"하고 물었다. "제가 생각할 때에 대산종사께서 만약에 사람들을 모아 놓고 우리 회상에 이러 이러한 일이 있으니 죽을 수 있는 사람을 묻는다면 당장에라도 몇 분이건 나오지 않겠어요?" 했더니 눈물을 글썽이던 박 원로교무는 눈물을 쏟으면서 "죽-지, 열 두번이라도 그 어른이 원하면 죽지." 예상했던 일이었지만 감동의 물결이 가슴 가득 차올랐던 기억이 새롭다. 이러한 신성이 그분 한분에게만 한한 일이겠는가?

부처는 하루에 황금 만냥을 소비해도 빚이 안된다고 했지만 대산종사의 알뜰한 모습은 종이 한 장을 함부로 쓰지 않았다. 치료 중에 티슈를 톡톡 뽑아 쓰는 나를 보고 "정선아! 휴지 좀 아껴라", "네!"하고 다른 부위에 더러움이 묻으면 안 되겠기에 그대로 쓰니, 그때는 아무 말씀 없다가 나중에 "휴지 아껴 써야지, 함부로 쓰지 말라. 너 아까 막 쓰더라"고 말씀했다. 당신은 휴지 속에 일력을 넣어 사용했고 양말, 장갑을 기워 드리면 좋아했다.

시봉하는 여자 교무들이 밤에 바느질을 오래도록 하는 것을 자주 보아왔다. 세세곡절 세정을 어떻게 아실 수 있는지. 누구든 조실에만 가면 항상 그 아픔들을 다 어루만져 줘 한번만이라도 뵙고자 많은 사람들이 간절히 염원 한 것은 생명수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뵙고 싶은 스승님! 세월이 가면 나아질까 했는데 이 세월이 지나도 매번 눈물이 난다. 그것이 걸음을 걸을 때일 수도 있고, 밥을 먹을 때일 수도 있고, 하늘을 바라볼 때일 수도 있고, 잠을 자다 불현 듯 깰 때일 수도 있다. 얼마나 이런 세월이 더 필요할지는 모르지만 영생을 통해 또 다시 모시게 될 날을 염원하며, 그때는 정말 철든 모습으로 잘 모실 수 있도록 오늘의 나를 가꾸면 기다리면 살 것이다.

※다음주부터는 교헌개정특별위원회의 쟁점사항을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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