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천지를 내 집 삼으라'는 표준 새겨
화랑고·동명훈련원·영산선학대 등 부엌봉공 15년
남편 열반 후 '필요하다는 곳 가서 살라' 받들어

밤 9시가 넘는 퇴근길, 그녀는 길가에 오도카니 서서 30분 되기를 기다렸다. 언젠가부터 들려오던 은은한 종소리를 듣기 위해서다. 30분이 되면 까만 치마에 흰 저고리의 여자가 종을 쳤고, 그제서야 하루 피로가 풀리는 것 같았다. 종교가 없던 그녀는 그곳이 원불교인 줄도, 그 사람이 교무인 줄도 몰랐다. 종 치는 모습을 보며 막연히 '나도 시집 안가고 저렇게 살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생각했다. 훗날 일원가정을 꾸리고 재가 출가교도들 밥해주러 다닐 줄은 꿈에도 몰랐던 53년전이었다.

세월이 훌쩍 흘러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가 됐지만, 돈암교당 홍타원 고정륜(78·弘陀圓 高正倫) 교도는 여전히 그 동경을 생생히 기억한다. "한번은 들어가서 "여기 살아도 돼요?" 했어요. 그랬더니 "'부모님 허락 맡고 다시 오세요'라고 하는 거예요. 아쉬움으로 추스르고 말았죠." 그리고 그는 한 남자를 만나 가정을 꾸린다.

"그런데 시어머니께서 어딜 가자고 하셨어요. 따라간 곳은 광주교당, 바로 그 종치던 집이었어요. 신기한 마음에 설법을 듣는데 성타원 이성신 교무님 목소리가 참 좋은 거예요."

알고보니 시외숙모 김성덕 정사(열반)는 대종사를 친견한 제자로, 고문국 종사와 고문기 종사의 어머니이자 훗날 창평교당 창립주가 된 인물이었다. 올케 따라 입교했던 시어머니 고도봉화 교도는 며느리를 광주교당에 데리고 나간 것이다.

"종소리에 반했다가 목소리에 마음을 잡았죠. 그런 인연이었으니 마음 한 자락 교당 밖으로 나간 적도 없는 것 같아요."

군인이던 남편을 따라 광주에서 부산으로, 부산에서 속초로, 다시 서울로 이사하면서도 이삿짐 풀자마자 교당 찾으러 갔던 고정륜 교도. 특히 20년을 살았던 속초교당이 신앙의 고향이다.

"속초에 왔더니 교당은 없고 조일관 교무님이 속초시장 집을 빌려 법회를 보고 계셨어요. 땅이 있어야 집짓겠다 싶어 교도들 열댓명이 계를 했어요. 돈을 모아 100만원이 되면 교무님 드리고, 그렇게 4~5년을 해서 지금 그 땅을 산 거예요." 서울로 이사해야했던 그가 7년만에 다시 찾은 속초교당은 봉불식 준비로 한창이었다. 그런데 번듯한 상 하나가 없던 상황, 그는 그길로 시장으로 향했다.

"이웃집에서 빌린다는데 그게 마음 아픈 거예요. 그래서 있는 돈을 털어 상과 쟁반, 컵과 주전자 등등 새것으로 봉불식을 치렀죠." 마땅한 교도회장감이 없던 상황에서 남편을 강하게 밀어붙이기도 했다. '당신이 회장 안맡아주면 내가 어떻게 행동할지 모르겠다'라는 반협박(?)으로 맡게 한 회장, 남편은 원기76년 갑작스러운 열반까지 묵묵히 역할을 완수했다.

"남편 상을 치르고 새벽 4시만 되면 속초터미널에서 서울가는 차를 타곤 했어요. 서울서 다시 익산으로 가서는 영모묘원에 우두커니 서있었어요. 그걸 당일치기로 수십번을 했지요. 그러다보니 대산종사님 눈에 띄었는지 한번은 오라시는 거예요."

비닐하우스에 들어서 절을 하는데 일어나지도 못하고 펑펑 울었다. 그런 그에게 스승은 "잘 왔다는 소리는 들었냐"고 물었다. "잘 왔다, 잘 가라 소리도 못들으면서 이렇게 오면 정신이 흐려진다"던 대산종사는 "혼자는 절대 오지 마라"고 당부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그를 일으켜세워 법장으로 등을 세 번 치며 "여기가 어딘데 오냐. 사람도 아닌 것이 왜 따라다니냐"고 크게 호통을 쳤다. 얼어붙은 그에게 스승은 '넓을 홍(弘)'의 법호 '홍타원'을 내렸다.

"그러고는 '온 천지를 네 집으로 삼고 필요하다는 곳이 있을테니 가거라' 하셨어요. 어안이 벙벙해서는 속초로 돌아왔는데 그날 바로 이타원 이정무 교무님께 전화가 온 거예요. 화랑고등학교가 개교한 해였는데, 학생들 밥 해줄 사람이 없다는 거예요. '부르시는 거구나', 싶어 "예", 하고 내려갔어요."

그길로 내려간 기숙사 부엌은 이상하게도 하나도 낯설지 않았다. 필요한 것이 있어 짐작으로 열어보면 꼭 그 자리에 있었다. '여기가 내 집이구나' 마음 잡고 꼬박 3년을 살았다.

"그게 시작이었어요. 그 후 동명훈련원에서 전화가 오고, 3년 살다가는 또 도봉교당에서 찾으셨죠. 그때는 짐까지 다 부쳤는데도 두 마음 없이 가서 3년을 살았어요. 몸 힘들때까지 무주교당 어린이집에도 1년반을 밥을 했지요."

그 뿐 아니다. 봉도훈련원에 1년, 영산선학대 식당에서 1년, 작년에는 우인훈련원에 일손이 모자라다 해서 일손을 도왔다. '이 한 몸이라도 필요하다는 곳이 있으면 언제든 가서 보은봉공하겠다'는 약속을 15년 가까이 지킨 것이다. 친한 교무들이 "홍타원님, 이렇게 복 많이 지어 내생 오셨을 때 뻐기고 살면 눈꼴 시어 어쩐대요~" 농담할 정도로 복전 쌓던 세월이었다.

교무의 삶을 꿈꿨던 그에게 전무출신의 서원은 여전한지 물었다. 그는 금세 손사래를 쳤다. "여기저기 어려운 곳들에 살아보니 그게 아니더라고요. 부잣집에 태어나 좋은 교당과 훈련원 지어 교무님들 마음편히 교화하고 교도님들 실컷 공부할 수 있게 해드리는 게 내생 서원이에요. 가는 날까지 보은봉공하게 해달라 그렇게 딱 두가지로 기도해요."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