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장차 수도도량이 될 만한 곳이다"

▲ 일원상비가 있는 훈련원 입구를 지나 바라본 봉도청소년수련원.
여름 한 낮 뜨거운 열기 속으로 침잠하는 도시, 수도 서울. 그 곳에 생명의 숲, 북한산이 있다. 회색빛 콘크리트 건물과 어우러져 공존하는 자연의 휴식처. 그 숲에 자리한 봉도청소년수련원은 분명 도심 속 안식처다.

봉도청소년수련원 입구에 들어서자 우거진 나무 숲 사이로 계곡 물 소리가 맑다. 여름의 정점, 그 거칠 것 없는 열기에 지친 마음까지 금세 차가워지는 느낌. 삶의 축복 같은 선물이란 생각이 들었다.

'법신불 명상'특화 프로그램

봉도청소년수련원을 찾아간 날 '세계청소년 통일교육'이 17박18일로 진행 중이었다. 이웃종교에서 진행하는 훈련으로 60여명이 참여하고 있는 훈련 일정. 3주 가까이 심도 있는 훈련을 진행하고 있는 이웃종교의 저력과 조직력에 내심 놀랐다.

소중각 교무는 "봉도청소년수련원은 교단 내 훈련 뿐 아니라 각종 사회단체, 종교단체, 일반인들의 훈련 신청이 많다"고 전했다.

그간 훈련원에 다녀간 단체만도 한국종교인평화회의, 종교환경연구원, 기독교어린이교사모임, 참여연대, 여성문제연구원, 장애인연맹, 표현예술치료연구모임 등 각계에서 참여했다. 한살림, 민주노총, 국선도 등 정기적으로 훈련원을 찾아오는 단체들도 있다.

소 교무는 "교단 내 훈련 또한 일 년에 15건 정도 실시하고 있다. 특화 프로그램으로 진행하고 있는 '법신불 명상' 프로그램은 교도들의 신앙증진 프로그램으로 호응이 크다"고 설명했다. 그는 "교단에서 훈련기관협의회를 통해 각 훈련원에서 진행하는 프로그램을 공유하고 있다"며 "'법신불 명상'은 법신불사은을 염송하면서 명상으로 사은과 하나되는 프로그램이다. 훈련원 프로그램의 롤 모델로 평가받고 있다"고 덧붙였다. 봉도청소년수련원은 특화 프로그램을 통해 교도들의 신앙 수행심을 진작시키며 법위증진에 한 몫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명쾌한 설법이 돋보이는 최소원 원장의 주제특강 또한 이곳 훈련원의 큰 장점이다. 바쁜 일정 속에서 잠시 시간을 쪼개 최 원장과 이야기를 나눴다. 최 원장은 "무엇을 아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무엇을 실천하느냐가 중요하다"는 생각으로 지금, 이곳에서, 자신이 성실히 할 수 있는 훈련원 운영에 매진하면서 자신성업 훈련도량을 만들어 가고있다.

최 원장은 "대종사님의 좋은 법을 교도들뿐만 아니라,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국민훈련으로 발전시켜 가고픈 염원이 있다"며 "온 국민이 우리 마음공부법을 통해 마음의 안정과 위안을 얻고 이를 통해 평화를 얻기를 바랄뿐이다"고 전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여 잊지 않는다는 '염념불망'의 간절함이 전해졌다.

잠깐의 만남을 아쉬워하며 저녁에 공양할 식재료 준비를 위해 최 원장은 재래시장으로 바쁜 걸음을 재촉했다. '반시도 쉴 틈이 없다'는 최 원장의 말이 실감났다.
▲ 봉도청소년수련원 최형철·최소원·소중각 교무(왼쪽부터).
소태산대종사 성적비

최형철 교무와 소태산대종사 성적비가 있는 훈련원을 돌아보기로 했다.
훈련원은 서울교화의 터전을 물색하던 대종사가 박장식 종사, 황정신행 종사와 우이동에 들렀다가 수도도량으로 점지했던 동산이다.

그는 "대종사께서 원기25년 서울교화에 주력하다가 '이곳은 장차 수도도량이 될 만한 곳이다'고 말씀하셨다"며 "당시 일본인 소유였기에 매입이 불가했다. 해방 후 이 땅의 소유자가 되었던 종로교당 신원관· 전은덕 교도(대호법) 부부가 대학 후배인 박장식 종사로부터 이 소식을 듣고 원기59년 당시 수도원장이었던 이공주 종사에서 9900㎡를 희사해 오늘날 봉도청소년수련원이 됐다"고 설명을 차근히 풀어냈다. 나무 숲 울창한 수련원을 걷다보니 어느새 성적비가 보였다.

'소태산대종사 성적비'는 '장차 수도도량이 된다'고 점지했던 대종사의 뜻이 실현돼 그 기연을 기념하기 위해 원기85년 12월에 세워졌다.

대종사가 우이계곡을 지나 우이령을 넘어 송추로 가면서 잠시 앉아 쉬었던 그 자리에 세워진 성적비다. 성적비 주변이 정갈하게 정리돼 있었다. 잡초 하나 보이지 않는 깨끗한 터가 이곳 사람들의 정성심을 말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성적비를 지나면 희사자의 공적을 기리는 묘역이 있다.

'해방 후 이 땅은 종로교당 교도이신 신원관(申圓觀), 전은덕(全隱德) 내외의 소유가 되었고, 두 분은 대종사의 유지를 받들어 이 땅을 기꺼이 희사하니 면적은 3천 여 평이요, 때는 1974년이다.' 묘역안내 일부분이다.

수련원의 명칭으로 쓴 '봉도(奉道)'는 부부의 법호 머리글자를 모은 것임을 안내문을 통해 알게 됐다. 이 대호법 부부는 서울은덕문화원도 희사해 북촌 한옥마을에서 문화교화를 할 수 있게 한 협시보살이다.

최 교무는 지금의 훈련원이 자리하기까지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음을 들려줬다. 수련원 신축허가가 추진 4년 만에 이뤄졌을 때 '성현의 말씀은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며 감격해했던 당시의 상황이 그대로 전해지는 듯 했다.

원기84년 봉도청소년수련의집 봉불 개원식이 거행됐고, 이후 이곳은 서울 시민 모두의 도덕 교육장으로, 세대를 초월한 재가 출가 공부인의 정신 훈련장으로 그 기능을 충실히 해나가고 있다.

훈련원을 천천히 걸으며 앞쪽으로 펼쳐진 우이령 고개를 바라봤다. 고개 넘어 오후 햇살이 산허리에 걸려 붉은 빛으로 훈련원을 물들였다.

시민 모두의 도덕 교육장
세대를 초월한 재가 출가 공부인의 정신 훈련장
도심 속 축복 같은 선물, 봉도청소년수련원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