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교 100년의 과제인 '자신성업봉찬'을 '속 깊은 마음공부'로 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왔다. 그냥 '마음공부'라고 해서 안 될 것이 없는데도 굳이 '속 깊은'이라는 수식을 붙이는 까닭은 그냥 '마음공부'라고 하는 말에서 다 드러내지 못하는 어떤 의미를 강조하고 싶은 마음에서다.

'속 깊은'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첫 번째 강조점은 마음공부는 기본적으로 성리에 기초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리(性理)의 성(性)은 '본래 마음'이란 뜻이다. 마음공부가 이 본성을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마음공부는 도덕이나 윤리규범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종교라 이름하고 성리를 밝히지 못하면 원만한 도(道)가 아니며 사도(邪道)'라고 이미 대종사께서 말씀한 바가 있거니와 종교(宗敎)의 종(宗)이란 이 본성에 기초한 가르침이며 윤리나 도덕과 차별화 된다. 그렇기에 성리(性理)는 '꾸어서라도 보아야 한다'는 부촉이 있었던 것 아닌가?

이와 같은 성리를 안다는 것이 곧 견성(見性)공부다. 성리를 모르면 원리를 알지 못하고 문제집을 외워 푸는 수험생과 같아서 조금만 상황이 다르면 판단이 난감해진다. 흔히 주변에 불사를 성취하거나 득도(得道)를 했다는 사람들이 아상(我相)과 법상(法相) 비법상(非法相)을 넘지 못하여 서투른 모습을 보게 되는 것도 다 실은 우리의 공부가 속 깊은 성리에 미숙하기 때문이다. 성리의 진경은 아상과 법상과 비법상을 넘어선 '무무역무무'이며 재색명리가 공(空)한 그 무엇이며 대소유무의 분별과 희로애락의 감정이 일어나기 전 소식이다. 언어도단(言語道斷)의 입정처(入定處)라 말과 글로 전하기가 어려우나 말과 글을 놓고 참 실경을 직접 공부하면 '코풀기보다 쉽다'고도 했으니 성리를 대하는 우리들의 자세를 뒤돌아 볼 일이다.

'속 깊은'을 통해 강조하고자 하는 또 하나는 자각(自覺)의 문제다. 수행은 기본적으로 자각의 문화다. 공부(工夫)라는 말은 중국어 쿵푸라는 말과 동의어로 수련, 수행의 뜻이었으나 근래에 이르러 중국에서는 무술의 대명사로, 한국에서는 학생들의 학습이란 의미로 바뀌어 정착되었다.

하지만 본디 자각이 없으면 자발(自發)도 없다. 불도(佛道)의 발원이 의타적이거나 피동적이거나 수행이 주위 체면과 평가에 의지해 있다면 그 동력이 얼마나 가능할 것이며 또 얼마나 지속가능할까? 이는 수행의 자기주도성 문제가 걸려있다. 아이는 산모가 낳는 것이지 산파가 낳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정전〉을 비롯한 교서에는 '훈련'이라는 말이 많이 등장한다. 이 말에서 느껴지는 반복성이나 집단성의 느낌은 원불교 훈련의 장점 혹은 독창성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분명 그런 점이 있다. 다만 '훈련'이라는 표현에서 수행의 '자발성', '개별성', '심오성'이 멀게 느껴지는 느낌이 있다. 훈련을 지나치게 도식화하고 그 평가를 계량화하며 프로그램화하면서 자기 주도, 자기 책임의 문제가 흐려지는 것은 아닌지 우리의 수행문화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이는 공부 혹은 훈련이란 표현에 대한 문제제기가 아니다. 근현대 한국역사를 관통한 식민지 문화와 군대문화, 개발독재문화에 오염된 언어를 자기 정화 없이 너무 쉽게 해석하고 유통시킨 우리들의 게으름에 대한 성찰까지를 말하고자 한다. 예비교역자 6년의 훈련과정이나 출가 교역자들의 정기훈련, 그리고 재가들의 법위단계별 훈련을 바라보면 더욱 그런 느낌이 든다. 자칫 가능성 큰 법기들을 옹졸한 종기로 양산하는 것은 아닌지 두려운 생각이 든다. 스승은 산모가 아니라 제자의 출산을 돕는 산파다. 스승은 제자의 발원과 자각을 돕는 분이지 제자의 수행을 책임지는 분이 아니다.

<경남교구장>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