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망과 학문으로 회상창업 기여

한문학자, 사학자, 교육자로서 사회적 명망과 해박한 식견으로 늦은 출가에도 불구하고 교역자 훈련과 교서편찬 등에 기여하며 새 회상 창업에 공훈을 나툰 유산 유허일(柳山 柳虛一, 1882~1958) 대봉도.

비교적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그는 타고난 총명함으로 이미 4세에 한문을 터득하고, 5세에 한시를 짓기 시작해 신동이라 소문이 났다. 13세 무렵엔 사서삼경을 통독하고, 주역을 공부해 후에 '유 주역'이란 별칭을 가질 정도로 한학에 밝았다. 또한 어머니가 아프자 정성으로 시탕을 해도 약효가 없어 단지를 해 어머니께 드려 회복하게 할 정도로 효성이 극진했다.

특히 민족해방에 뜻을 두어 독립지사들과 교류하며 독립활동을 했으나, 국내에서의 활동에 어려움이 따르자 전답을 팔아 상해로 가려던 차에 부친의 열반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런 활동은 요시찰 인물로 낙인이 찍혀 자유로운 활동을 제지당했다. 활동이 어렵게 되자 후진을 양성하는 길이 독립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는 생각으로 신학문에 정진하여 33세 때 영광 보통학교 교사가 됐다.

교편생활 중에 3·1독립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영광군에서도 10차례의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그는 요시찰 인물로 직접 만세운동에는 참여할 수 없었지만 학생들을 지도하며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다.

또한 일본시찰단으로 선발되어 일본사회의 문물을 보고 민족의 독립을 위해서는 실력양성이 시급함을 자각하고 학생들의 정신을 일깨우는 일에 주력했다.

46세 때는 중학교원으로 추천 됐으나 사상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좌절됐다. 이 무렵 '훈민정음 기념 강연회'에서 국사강의를 하다 일경에 체포되어 갖은 고초를 겪었다. 이후 오지로 좌천 되는 등 일경의 교원활동에 대한 방해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교원을 사임했다. 몇 년을 좌절감으로 지내다 우리 회상을 찾게 됐다.

그는 51세에 소태산대종사를 만나 다음해에 출가를 단행했다. 대종사는 '허일(虛一)'이란 법명을 내려줬다. 사회에서 가졌던 명예와 유학자라는 관념 등을 내려놓으라는 법명이었다. 대종사는 그의 사회적 명망과 뛰어난 학식을 높이 평가하여 원기18년 교무 자격을 주어 총부학원 교무로 활동하게 했다.

원기21년에는 공익부장을 겸임했고, 55세에 정수위단 간방에 피선됐다. 원기24년에 교정원장에 임명되어 4년을 봉직한 후 다시 총부교감에 임명되어 〈불교정전〉 간행에 공헌했다.

원기30년 광복이 되자 전재동포 구호사업을 하는 한편, 대한건국준비위원 종교연합회 이사와 중앙방송국 방송위원으로 활동하며 국사와 불교강의를 하며 우리회상의 명예를 빛나게 했다. 원기31년에는 총무부장에 임명됐고, 원기33년에 다시 교정원장에 선임됐다.

이때 원불교 재단법인 설립인가를 추진하여 인가를 얻어 초대 이사장의 역을 맡았다. 또한 원광대학교 설립 위원장을 맡아 원기36년에 초급대학의 인가를 얻어 〈조선역사〉,〈국사통람〉등을 강의했다.

그는 우리회상에 입문하기 전에 이미 유학과 불교에 대한 상당한 식견을 갖추고 있었다. 그런 배경위에 우리회상을 만나 원융무애한 종교관을 확립할 수 있었다. 말년에는 수양에 전념하고, 지방을 순회하며 교화일선에 도움을 주며 〈불교정전〉한역과 가사인 〈국사가〉 집필 등에 전념하다 25년의 출가생활을 정리하고 원기43년 77세를 일기로 열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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