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산종사가 요양했던 원평교당 터는 수몰되었다(현 금평저수지).

기도하며 약초를 캐다

대산종사의 서울출장소 3년 동안의 근무는 국내 정치인들과 교류하며 교단 위상을 드러내고 한국 속의 원불교 입지를 크게 구축하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원기34년 폐결핵이 재발했다. 의사는 체념한 듯 "인명은 재천이니 당신 하고 싶은 대로 하십시오" 하면서 아무런 처방도 주지 않았다. 총부로 돌아온 대산종사는 김제 모악산 아래 원평교당으로 갔다.

대산종사는 원기34년 4월부터 원평에서 투병생활을 다시 시작했다. 약물치료 보다도 맑은 공기 마시며 정신력으로 버티어 나갔다. 모악산과 제비산, 구성산 등 원평 주변의 산들을 규칙적으로 다니며 기도올리고 약초를 캐는 것으로 일과를 삼았다. 약초 한 뿌리를 캐도 한 망태 못 캐어도 한 망태, 약 망태를 큼지막하게 벌리고 다녔다.

때론 인연 닿는 곳에서 감도 따주고 청소도 해주며 바쁜 농촌의 일손을 돕기도 했다. 늦가을이 되면서부터 밤낮 없이 신기한 생각들이 쏟아졌다. 때로 글을 쓰면 어느 대 문장가 못지않을 만큼 많은 시(詩)를 쓸 수 있을 것 같이 줄줄이 쏟아져 나왔다.

대산종사는 소태산대종사가 '허령(虛靈)이 열릴 때를 조심해야 된다. 허령이 열리게 되면 저 자신 하나만 그르치지 않고 남의 일생을 그르치니 무서운 것이다'고 한 말씀이 생각났다.

이 경계의 말씀이 떠오르면서 자신도 모르는 기운이 솟아나자, '이왕 죽을 몸이라면 대종사님 법문이라도 정리하고 죽자'는 결심을 했다.

정진문으로 허령을 떨치다

대산종사는 허령을 떨치기 위해 정진하면서 〈정진문(精進文)〉을 썼다(국한문 혼용의 정진문을 해석하면 아래와 같다).

대산종사의 서울출장소 3년 동안의 근무는 국내 정치인들과 교류하며 교단 위상을 드러내고 한국 속의 원불교 입지를 크게 구축하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원기34년 폐결핵이 재발했다. 의사는 체념한 듯 "인명은 재천이니 당신 하고 싶은 대로 하십시오" 하면서 아무런 처방도 주지 않았다. 총부로 돌아온 대산종사는 김제 모악산 아래 원평교당으로 갔다. 대산종사는 원기34년 4월부터 원평에서 투병생활을 다시 시작했다. 약물치료 보다도 맑은 공기 마시며 정신력으로 버티어 나갔다. 모악산과 제비산, 구성산 등 원평 주변의 산들을 규칙적으로 다니며 기도올리고 약초를 캐는 것으로 일과를 삼았다. 약초 한 뿌리를 캐도 한 망태 못 캐어도 한 망태, 약 망태를 큼지막하게 벌리고 다녔다. 때론 인연 닿는 곳에서 감도 따주고 청소도 해주며 바쁜 농촌의 일손을 돕기도 했다. 늦가을이 되면서부터 밤낮 없이 신기한 생각들이 쏟아졌다. 때로 글을 쓰면 어느 대 문장가 못지않을 만큼 많은 시(詩)를 쓸 수 있을 것 같이 줄줄이 쏟아져 나왔다. 대산종사는 소태산대종사가 '허령(虛靈)이 열릴 때를 조심해야 된다. 허령이 열리게 되면 저 자신 하나만 그르치지 않고 남의 일생을 그르치니 무서운 것이다'고 한 말씀이 생각났다. 이 경계의 말씀이 떠오르면서 자신도 모르는 기운이 솟아나자, '이왕 죽을 몸이라면 대종사님 법문이라도 정리하고 죽자'는 결심을 했다. 대산종사는 허령을 떨치기 위해 정진하면서 〈정진문(精進文)〉을 썼다(국한문 혼용의 정진문을 해석하면 아래와 같다).
 

▲ 대산종사가 종법사 시절 원평교당을 찾아 요양시절 다녔던 제비산을 찾았다.

'여기에 한 물건이 있으니 형상도 없고 모습도 없어서 취해도 얻지 못하고 놓아도 얻지 못하나, 그러나 배우는 이는 마땅히 정밀히 깊이 연마하여 눈을 얻으면 그 형상이 그 형상 아님이 없고, 그 모습이 그 모습 아님이 없음이라. 취하여도 얻고 놓아도 얻어서 그 소리가 공겁 밖에까지 쟁쟁하고 그 빛이 교교히 삼천계를 비추어 응하여 천백억화신을 나투어 널리 육도 미륜 중생을 제도하나니 원컨대 모든 배우는 이는 일대사 인연을 해결하기로 맹세코 큰 믿음을 발하고 맹세코 넓은 원을 세워서 신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아끼고 탐함을 내지 아니해서 반드시 틀림없는 한 곧은 마음으로 용맹 정진하고 용맹 정진할지니라.'대산종사는 정진문을 읽으면서 한 생각이라도 흩어져 아닌 기운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노력했다. 원평 주변의 산을 망태기 하나 지고 샅샅이 다녀 바늘 하나 있어도 찾을 수 있을 만큼 됐다. 산에 다니는 것이 요양이며 적공이었다. 그리하여 건강이 회복되고 지혜의 문이 열리었다. 한번 생각하면 조금도 걸림 없이 솟았다.

〈대종경〉 초안을 정리하다

대산종사는 '한생 흐트러진 정신을 모아 대종사께서 설하신 법문을 정리하고 이 세상을 깨끗이 떠나리라'고 생각하며 법문을 정리하는 동안 병고(病苦)도 잊었다. 병고를 잊으니 조금씩 건강이 회복되어갔다.

대산종사는 소태산대종사의 법문정리에 총력을 기울이며 정산종사께 수록의 형식을 여쭈었다. 정산종사가 유교의 〈논어〉 식으로 하자고 하여 〈대종경〉 초안을 정리해 나갔다. 정산종사가 많은 격려를 해 주었다. 그리하여 밤낮으로 〈대종경〉 초고를 마쳤고, 채약송(採藥頌), 무실무득법(無失無得法), 원상대의(圓相大意) 등 많은 시문(詩文)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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