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마음
오직 공심으로 살겠다는 신념

▲ 송도식 원무 / 과천교당
원기96년 4월8일 원무 사령을 받은 나는 사실 원무가 무엇을 하는 것인지 정확히 알지 못한 상태에서 이러한 영광을 안게 됐다. 어머니 손에 이끌려 어린 나이 입교를 했고, 교육대학 시절 원불교 학생회 회장으로서 활동을 했지만, 결혼 후에는 교당생활이 여의치 못했다.

세월이 흘러 6개월 간격으로 부모님이 열반하고 왕궁 영모묘원에 안치됐다. 용인교당과 김해교당에서 재를 지내는 도중 용인교당 성정진 교무의 권유와 부모의 유지를 받들어 아내와 함께 어머니가 김해교당에 다닐 때 초임 교무로 재직했던 박지명 교무가 있는 과천교당에 다니기로 했다.

원기90년 과천교당 신정절 행사를 가기 전날 밤, 꿈에 열반한 어머니가 버스에 올라오더니 나를 보며 "잘 앉아있네"라고 말하고 사라졌다. 참 기이한 꿈이었다.

중앙총부로 신년하례를 가는 도중 영모묘원에 들러 부모의 묘소에 참배한 후 경산종법사 법문을 받들었다. 교당으로 귀가하기 위해 버스에 앉아 있는 데 부교무가 올라와 나를 보더니 "잘 타셨네요!" 라고 말하고 내려갔다. 참으로 이상한 전율 같은 것을 체험했다. 그때 내 마음이 이 회상에 안착된 것 같았다.

나의 인생은 파란만장했다. 교사로 출발해 회사(고려화학, 한국특송, 논노패시픽코리아, AM코퍼레이션)를 거쳐 (주)삼혁이란 회사를 동업으로 차렸다가 다시 교사의 길로 돌아왔다.

어렸을 때 가정형편이 여의치 않았어도 어머니는 항상 긍정적인 생각으로 원불교를 지극히 신앙하며 새벽 좌선과 심고, 참회 기도를 쉬지 않고 꾸준히 했다. 어머니의 기도는 성불제중의 큰 서원보다 먼저 자식들이 잘 되기를 일심으로 기도했다.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마음, 일원상과 같은 어머니의 염원으로 나는 광대무량한 낙원의 세계로 들어왔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다. 아무리 좋은 경전, 〈원불교교전〉이 내 옆에 있어도 그대로 두면 보배가 될 수 없다. 한알 한알 구슬을 꿰듯이 교전공부를 쉬지 않고 꾸준히 할 것을 서원했다.

원무가 되고나서 원기96년 5월28~29일, 중앙총부 공회당과 미륵산 자연학교에서 교화훈련부 주관으로 신규 원무훈련을 받았다. 일원대도의 법음을 세계 곳곳에 전하는 으뜸 교화 보살이 되자는 것이 훈련의 목적이었다.

나에겐 당시의 훈련목표가 매우 인상적이었다. 첫째 스승들의 훈증을 통해 법의 충만함을 느껴본다. 둘째 원무의 역할을 정확히 숙지한다. 셋째 교화의 활동 방향과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한다. 넷째 원무 상호간 친목을 도모한다.

원무란 '거진출진으로 원무의 자격을 인증 받아 재가하면서 힘 미치는 대로 교화사업에 협력하는 자'를 말한다.

또한 교단의 법통을 지키며 종명과 공명에 따르고 생활 속에 교리를 실천하여 일반교도의 모범이 되며 일원대도의 법음을 방방곡곡에 전하는 것을 사명으로 삼아 그 대우에는 계교하지 않고, 오직 공심으로 살겠다는 신념을 지녀야 한다. 그것이 바로 원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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