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샌프란시스코교당 이성하 교무가 정원의 잡초를 제거하고 있다.
무식의 용감함으로 뭐든 다 하던 시절이 있었다. 내가 가진 동력은 생각하지 않고, 의욕만으로 마지막 체력까지 다 긁어 쓰던 순간도 있었다. 한글학교, 요가 선방, 동네 신문에 칼럼, 홈리스 쉘터의 자원봉사, 하숙….

그러나 교화는 생각처럼 잘 되지 않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넘치는 의욕과 욕심에 비해 초점이 예리하게 모아지지 않았던 것 같지만, 아무런 인력도 기반도 없이 가장 가까운 교당이 비행기 타고 두 시간 반이 걸리는 곳에서, 더구나 혼자 살던 시절에는 뭐든 해야 하는 절박함이 있었다.

그러나 내가 절박한 심정인 것과 교화 상황이 비례하여 나아지는 것은 아니었다. 사십대를 지나던 시절이라 썰렁한 법당은 어쨌든 떨떠름했다. 그런 실수를 몇 차례 하고 보니, 이제는 뭐든 쉽사리 시작하려 하지 않게 됐다. 점점 교화 전략 또한 수성(守城)의 입장으로 바뀌게 됐다. 안주의 방향으로 한 걸음 옮겨 선 것이다.

쓴 맛을 몇 번 보고 나니, 무난한 차선책을 생각하게 된다. 험난한 최선의 시도보다는 내실을 키우자는 식의 무난한 차선책이란 것이 내 상황에서는 교화 침체라는 악순환을 만들어 낼 공산이 크다. 미국의 교화 여건이 어떤 상황이든 그 상황의 최선을 끌어내야 하는 게 교화자의 과제인데 나는 사실 힘이 들어가는 최선보다 힘이 덜 드는 차선, 즉 진보보다는 수성을 택하고 싶은 것이다. 교단 100주년을 맞이하는 이 시점에서 미국안의 원불교는 '진격의 원불교'가 되도 사실 모자란다. 의미 있는 변화를 만들어 내는 것은 국내도 마찬가지이나 해외에서는 더욱이 교화자의 의지와 실천의 문제만이 아니다.

교화에 필요한 기초적 기반, 즉 직간접적 교화 인력이나 경제적 융통성, 문화적 접근성, 언어적 소통 능력 등이 떠받쳐 주지 않는 환경 속에서 교무 1인의 전반적인 교화가 이루어지는 상황이라면 애초에 그 교화는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삼 사십년 전을 생각하면 지금의 미국 교화 환경은 어변성룡이라는 말을 실감할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쯤에서 개인적으로 숨고르기가 필요하단 생각을 해본다.

100주년의 터닝 포인트를 돌고, 그 다음의 새 100년을 맞이하기 위해 뜻대로 되지 않은 시절이 가르쳐준 것들을 하나씩 되짚어 생각해봐야 한다.

무엇보다 나 자신이 가진 능력과 교화력을 재구성하며 어떻게 스스로를 사용해야 하는지, 무언가를 새로 만들어 하기 보다는 나의 강점, 우리 교당의 강점은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유일화해 최대화 할 것이고 교화에 접목시키는 구체적 방법은 무엇인지 말이다.

교화를 할 때 어디에서 힘을 덜어서 어느 곳에 집중해야 하고, 진격의 방향은 어디로 해야 하는가, 어떻게 해야 이 진격의 강도를 높일 것인가에 대한 정리가 필요한 시점인 것 같다. 20여년이 다가오는 나의 교화 사업도 새로운 코너를 돌아서야 하기 때문이다. 그만그만한 현지인 선방과 그만그만한 규모의 법회가 몇 년을 이어지다보니 이런 현실도 '그럭저럭 견딜만한 현실'이 되어 무난한 차선에서 힘을 멈추고 싶어지기 전에 다시 험난한 최선으로 돌아가야 한다. 좀 더 스마트해지고 단단해진 마음을 지니고서 말이다.

100주년을 지나 새로운 코너에서 유무식 남녀노소 선악귀천을 막론하고 인종과 언어의 장벽을 넘어선 인연들을 만나기 위해서 적당한 숨고르기와 힘 고르기를 한다. 다음의 100주년은 내게 다가오는 100주년이 아닌 내가 만들어가는 100주년이 되기를 기도하고 있다.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