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불교 초기교서.
중앙총부의 총체적 면모 갖추기
소태산대종사는 일원대도를 세상에 펼쳐 내기 위해 익산총부의 면모를 총체적으로 갖추었다. 통치의 근간이 되는 체제 구축과 행정체제 확립, 농업을 기본으로 하는 공동체생활, 교화의 도구로써 교리제도와 강령제정, 교화자의 자질향상과 소통을 위한 교리 강습을 실시했다. 그리고 〈월말통신〉과 〈회보〉를 발간하여 정보를 나누며 일사불란하게 합력하는 교단의 면모를 갖춘 것이다.

중앙총부의 행정체제구축은 원기18년(1933)부터 대종사가 정산종사에게 부탁해 〈회규〉의 개정 작업을 진행케 한 후 원기19년(1934) 3월, 총대회의 찬성을 얻어 그동안 시행 해온 총재·회장 아래 7부제로 된 회규를 대폭 개정하여, 종법사·회장 아래 2원10부제를 골자로 하는 총 9장29조의 원칙과 총 12장75조의 세칙으로 된 새 회규를 제정·시행하게 됐다. 이는 실로 새 회상이 교단의 새 체제를 형성하게 된 중요한 작업이었다.

이에 따라, 그 동안 총재라 칭해 오던 회상의 최고 직위를 종법사라 하게 됐고, 그 아래 회장과 2원10부를 두어 회무를 분장하되, 교정원에 교무·연구·통신·감사 4부를 두어 공부계의 모든 사무를 총괄하게 하고, 서정원에 서무·상조·산업·공익·육영·공급 6부를 두어 사업계의 모든 사무를 총괄하게 했으며, 총 대회를 대의 기관으로 두고, 회원은 통상 회원·특별 회원 2종으로 하되, 의무를 지키지 않는 신도 제도를 두었으며, 지방에는 지부와 출장소를 두고, 중앙에 입법 위원회를 두어 규약의 실행 장려와 감시 독려를 하게 했다.

이 때 종법사에 대종사, 회장에 조송광이 유임되고, 초대 교정원장에 송규, 초대 서정원장에 이재철이 선임되었으며, 원기22년(1937)에 3대 회장에 이용광, 2대 교정원장에 송도성이 선임됐다. 당시 도산 안창호가 교단을 방문, 소태산대종사와 상봉한 후 일제의 감시를 받기도 했다.

교화의 도구, 제도 강령제정
교화 도구의 일환으로 전무출신과 거진출진을 조직 관리하는 통치조단규정과 교법을 담아서 설명하는 교서와 회원이 수지독송하고 행동과 실천 할 수 있는 지침서 등이 체계적으로 발간됐다. 원기15년(1930)부터 대종사가 그동안 편편으로 제정 발표한 교리 제도의 강령들을 제자들에게 정리 편집케 한 후, 친감(親鑑)을 거쳐 차례로 발간하였다.

원기16년(1931) 7월에는 〈불법연구회 통치조단 규약〉이, 원기17년(1932) 4월에는 〈보경 육대요령〉이 발간되었고, 원기19년(1934) 5월에는 개정판 〈불법연구회 회규〉가, 그해 12월에는 〈보경삼대요령〉이 발간됐으며, 원기20년(1935) 4월에는 과거 봉래산에서 초안한 〈조선불교혁신론〉이, 그해 8월에는 〈예전〉이 발간됐고, 원기21년(1936)에는 〈회원수지〉와 〈불법연구회 약보〉가, 원기24년(1939)에는 〈불법연구회 근행법〉이 각각 발간되었으며, 원기25년(1940)에는 새 회가와 찬불가·찬송가 등이 제정 발표돼, 창립 제2회 12년간은 가위 초기교서 편집발간의 황금 시기를 이루었다.

〈삼대요령〉은 육대요령 가운데 제3장까지가 촬요 편찬된 바, 심고와 기도에 대한 설명이 제1장 끝에 들어 있다. 〈조선불교혁신론〉은 총론에 혁신의 대요를 밝히고, 과거 조선 사회의 불법에 대한 견해·조선 승려의 실생활·세존의 지혜와 능력·외방의 불교를 조선의 불교로·소수인의 불교를 대중의 불교로·분열된 교화 과목을 통일하기로·등상불 숭배를 불성 일원상(佛性一圓相)으로 등 7개장으로 편찬된 바, 일원상 신앙법과 일원상 조성법이 나타나 있다.

월말통신과 회보 발간, 교화정보 나누며
제1회 기념총회(원기13년 3월)를 마치고 제2회에 접어들면서 새 회상이 먼저 착수한 중요한 일은 교화 기관지의 발행이었다. 원기13년(1928) 5월에 월간 〈월말통신〉이 송도성이 주간으로 창간되어 복사판으로 34호(원기15년 12월호)까지 발행하다가, 교서 편찬 등 사무 관계로 한동안 중단되었다. 원기17년(1932) 4월에 복간, 〈월보〉로 개제하여, 전음광 주간 아래 등사판으로 48호(원기18년 6월호)까지 발행하다가, 출판법 관계로 적발되어 48호 전부를 일경에게 압수당하고 폐간 되었다.

원기19년(1934) 12월호(회보13호)부터 통신부장 이공주 주간으로 인쇄판을 발행, 점차 부수가 증가되었으나, 25년(1940) 제2차 세계대전이 급박해지면서 계간으로 바꾸었다가, 26년(1941) 1월, 통권65호를 마지막으로 휴간하였다. 〈월말통신〉은 당시 몇 개소의 지방 교당에 법설 요지와 총부 전달 사항 및 교단 소식을 보도하였고, 〈월보〉와 등사판 〈회보〉는 의견 교환의 역할도 겸하였으며, 인쇄판 〈회보〉는 차차 교화와 문화 기능도 겸하게 되어, 일정 압제 아래 유일한 문화 활동의 명맥을 이었다. 법설 기재와 감각·감상·의견·처리·문목건 등의 제출이 많이 권장되어, 초기 교단의 정신적 유산으로 길이 남게 되었다. 원기23년(1938) 11월21일에는 새 회상 처음으로 교무 강습회를 개최하고 각 지방 교무를 총부에 소집해 대종사 친히 설법하며 40일간의 교리 훈련을 실시하니, 이것이 원불교 교무훈련의 효시다.

"통치를 위한 규약! 교법을 담은 교재, 교조를 모시고 법설을 들으며 40일간의 교무훈련! 총부-지방 소통과 교화정보 교환의 통신지 발간, 이것이 교화의 동력이다."

<교화연구소/100년 총람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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