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축음기 (1920~1940,  35cm x 44.2cm x 35cm)
이 축음기는 소태산대종사가 초기에 신문화를 받아들인 대표적인 기구이다. 유물작업을 하다 보면 고급스러운, 혹은 그 시대에 대중적으로 보급되지 않았던 귀한 유물들이 몇 점 발견 됐다.

그 당시에 원불교 교단도 제대로 정립되지도 않았을, 그야말로 초기의 가세가 가난한 교단인데…. 소태산대종사의 몇 몇 유품은 너무나 귀할 뿐 아니라 고급스러워 잠시 혼란스럽기까지 했던 기억이 있다.

그런 생각을 들게 한 유물들 중에 축음기도 그 하나이다. 그 당시 축음기와 음반은 국내에서 자체 제작이 어려웠고 특히나 음반의 경우는 일본에서 녹음을 해 오는 것이기 때문에 국내에서는 일부의 한정된 계층에서만 누리고 있는 물품들이었다.

간혹 축음기와 같은 것은 재력이 있는 선진들이 소태산대종사에게 귀한 물건을 시봉해서 교단에서 사용하였거나, 또는 소태산대종사의 필요에 의해 마련한 것이었다.

대중에게 주경야독하며 교육을 매진 할 때 신식문화를 자연스레 접하게 한 것이라 볼 수 있겠다.

즉 소태산대종사는 당시의 나태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부지런한 생활인으로 훈련하였고 동시에 불법을 알려주며 생활에서 받아들일 수 있게 '생활시불법 불법시생활'을 할 수 있게 훈련시켰다.

주경야독하며 훈련의 일상들이 계속 될 때 부패하고 타성에 젖어있던 기성의 불교관념에서 벗어나 일상생활 속에서 영육쌍전, 처처불상, 사사불공, 자리이타, 이사병행 등을 실천할 수 있게 훈련 해 나갔다.

소태산대종사는 간혹 너무 힘든 일상을 탈피하여 일탈을 경험하는 깔깔대소회를 열 때 축음기를 사용 했다고 하며 대중들과 장기자랑도 즐기고 한담도 나눴다고 했다.

제자들에게 훈련과 더불어 신문화를 자연스레 접할 수 있게 유입한 것이고, 나아가 민족의 관습화된 관념 즉 춘향전에서 보여준 여성의 주관적 의지, 흥부전의 소외된 계층에게 희망을 주며 형제애 등을 부각 시키며 지킬 수 있게 한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겠다.

이렇듯 소태산대종사는 공부와 사업과 휴식시간 마저도 훈련의 연속이었던 것임을 ….

원불교 역사박물관에 진열되어 있고 보관돼 있는 축음기와 LP판에서도 개화적이고 미래 지향적인 소태산대종사의 교화법을 단순히 〈대종경〉에서 읽으며 존재하는 하나의 일화로만 인지한 상태를 넘어 그 당시의 신문화 수용과 바람직한 민족 전래 관습을 통한 일반 대중의 자존감을 일깨운 것을 확인해 볼 수가 있겠다.

창립 100주년을 맞이하는 우리는 외부적 상황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제 소태산대종사 때에 진행되어 큰 반향을 일으켰던 것들을 재조사하여 우리 사회를 이끌 수 있는 민족의 자랑스러운 유산과 함께 면면이 이어온 민족종교 원불교를 재구성하는 일에 총력을 기울여야겠다.

<원불교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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