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는 설명기도겠지, 해도 또 묵상심고다. 눈치만 보다 지나는 침묵의 시간이라면 너무 불경할까. 그런데 진짜 그렇다. 뭘 빌까 하다 어영부영 지나기 일쑤인 묵상심고, 교도들은 '교무님이 해주는 기도'가 듣고 싶은데, 법회외엔 도통 들을 기회가 없다.

교무는 교화하는 사람 맞지만, 크게 보면 성직자 자체는 기도하는 사람이다. 세상을 어찌할지 기도에 기도를 거듭하다 결국 목숨까지 내놓은 백지혈인이 우리의 창립정신이요, 무슨 일만 있으면 '기도부터 하자'고 했던 스승의 일화에서 배워온 것이 우리 역사다. 그런데 왜 기도가 딱 필요한 순간엔 늘 묵상심고일까. 우리는 왜 기도하지 않는 것일까.

재가도 마찬가지다. '법사' 칭호가 붙어도 기도 한자락 들어보기가 힘들다. 기회가 있어도 자신없다고 자꾸 뺀다. 기도 문화가 없어서고, 기도 훈련이 덜 되어서다. 교무, 법사라는 분들이 기도를 안 하는데 새 교도는 왜 할 것이며, 신심은 어디서 오겠는가.

선배일수록, 법이 높을수록 기도를 나서서 해야 한다. 특히 성직자의 기도는 예문 없이도 눈감고도 술술 나와야 하며, 세상 없어도 기도 연습을 거듭해 간절하고도 막힘없는 수준이 되어야 한다.

성직자들의 훈련된 기도는 이웃종교인에게도 비교도들에게도 깨침과 감동을 준다. 윤 일병과 군 폭력 피해자들을 위한 추모제에서 하나님을 부르짖는 한 목사의 기도는 유족과 참석자들의 박수와 눈물을 이끌어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기도 한 문장은 많은 이들의 좌우명이 됐다. 나와 너, 우리를 넘어 이 나라와 사회, 전 인류를 위해 기도하고, 그것도 언제 어디서든 소리내어 기도해야 한다. 그것이 가깝게는 교화 침체를 타개할 본원적인 힘이요, 주세교단에의 근원적인 해법이다.

그런데 심고와 기도, 언제 무엇이 맞을까. 예도편에 나와있다. '단독의 경우는 대개 묵상', '대중의 심고 내용을 통일하기 위해 설명기도를 올리게 되는 것'이며, '주례자나 대중의 대표 한 사람이 예문을 설명 기도로 하면' 마지막에 '일심으로 비옵나이다'라고 함께 하며 마치는 것이다.

종교에 있어 기도는 생명력이다. 그런데 '기도 잘 하는 교무' 이름 하나가 안 떠오른다. 우리의 입이 안 터졌는데 어떻게 감동시키고 교화할 것인가. 교화 안된다 불평하기 전에 소리내어 기도부터 하자. 종교인은 기도로써 세상에 보은하고 봉공하는 법이다. 교무와 교도 함께 기도를 연습하며 가르치는 도반이 되자. 기도가 필요한 순간 빼지 않고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 거룩하고 아름답게 기도하는 교무와 교도. 원불교인으로서의 자부심과 소속감, 우리의 신심은 바로 거기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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