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문명 트렌드를 상징하는 많은 말 가운데 융합, 또는 통섭이란 단어가 떠오른다. 우리 교법의 원만· 병진·중도 그것은 우연의 일치일까? 아닐 것이다. 대종사께서 깨달음의 혜안으로 미래를 전망하신 결과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 교법은 시대 흐름과 함께하는 특징을 가진다. 정신문명과 물질문명의 병진, 도덕문명과 과학문명의 조화, 영과 육의 쌍전, 이와 사의 병행, 동과 정의 일여, 불법과 생활의 조화 등 모두가 가장 원불교다운 특징이라고 해도 이의가 없을 것 같다. 이런 총체적 교법의 특징은 신앙과 수행에 있어서도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신앙과 수행의 병진은 물론이려니와 수행에 있어서도 수양·연구·취사의 병진이 철칙으로 강조되고 있다. 대종사 이래로 삼학병진의 정신을 훼손하는 제자에게는 크게 경책했다는 일화는 무수히 많다. 좌선을 게을리 하는 제자에 대하여 크게 꾸중했지만, 좌선 수행을 중하게 여겨 대중이 함께하는 공동 출역에 소홀히 하면서 편수를 정당화하는 제자에게는 더 엄하고 무섭게 꾸중했다고 전해진다.

정산종사와 대산종사로 이어지는 수행의 전통에서도 이와 같은 원칙은 견고하다. 대산종사는 견성·양성·솔성의 병진수행에 더 나아가서 '견성공부도 양성과 솔성을 아우르고 양성공부 역시 견성과 솔성을 아우르고 솔성공부 역시 견성과 양성을 아울러야 원만한 중도의 수행이 된다' 하며 이를 대원견성·대원양성·대원솔성이라했다. 여기서 특별히 대원(大圓)의 접두어를 붙여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크게 원만한 수행이란 뜻일 것이다. 크게 원만하다 함은 곧 원융(圓融)하다는 뜻일 것이니 이야말로 앞으로 미래 시대에는 수행도 원만한 중도 수행이 아니면 아니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대산종사는 〈교리실천도해〉에서 삼학수행을 다섯 번에 걸쳐 주해하면서도 수양을 기질수양과 심성수양 내외로 겸전하게 하고, 연구를 이사로 사물의 지식과 자성의 지혜로 병행케 하며, 취사를 다시 안과 밖으로 나누어 내면의 덕성과 밖으로 계행청정을 수행토록 당부했던 기억도 선명하다.

근래 토론 모임에 가면 간혹 수행의 전문화가 화제가 되는 경우를 접하게 된다. 주장의 예를 간단히 요약하면 대개는 염불·좌선 전문 수행가를 양성하고 경전도 각각 경전에 대한 전문가 양성이 필요하다는 주장인 듯하다. 대학 예비교무 양성과정이나 훈련원 등에서 수행방법의 전문 지도자가 필요하다는 주장이라면 충분히 공감 가는 말이다. 하지만 마치 좌선을 집중해서 선력을 얻게 되면 궁극은 통한다는 논리로 수행을 과목별로 전문화시키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좌선을 열심히 하거나 경전을 연구하거나 봉사를 잘하거나 그 중에 하나를 잘하면 된다는 논리다. 그러나 수행은 기능교육이 아니다. 수행은 전인적(全人的) 인격의 도야와 관련한 공부다. 한 때 대학이 전공을 세분화하면서 학문적 깊이를 주장한 적이 있으나 지금은 자연과학조차도 통섭과 융합이 큰 흐름이 되고 있다. 기업에서조차도 통합 인재의 양성이 대세가 되고 있다.

교화현장도 마찬가지다. 가령 설교만 잘하면 교화가 잘 이루어질까? 좌선만 잘하면 교화가 잘 이루어 질수 있을까? 정전 강론만 잘하면 교화가 일어날 수 있을까? 아니다. 설교를 잘해서 한 때 붐은 일으킬 수 있고 좌선을 잘해서 따르는 추종자들의 지도자는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조금 더디고 힘들더라도 교법의 정신을 따라 천지 부모 동포 법률의 원만한 사은 신앙과 수양 연구 취사의 삼학병진과 자력양성 등 사요의 원만한 실천력이 원만 중도의 바른 길이라고 믿는다. 꼭 그렇게 해야 한다. 대산종사의 '교법의 선언'은 그 정신의 집약이다.

<경남교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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