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화의 효시

소태산대종사의 서울지방의 첫 제자로 서울교화의 효시이자 이타원 장적조·삼타원 최도화 대봉도와 함께 교단 3대 여걸이라 칭한 일타원 박사시화(一陀圓 朴四時華, 1867~1946)대봉도.

그는 전북 남원에서 출생했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극진해 16세 되던 해, 모친의 병환이 위중하자 단지선혈을 올려 기적같이 소생하게 했다. 18세에 혼인을 했으나 16년이 지나도록 슬하에 혈육이 없을 뿐 아니라 부군과 사별하고 말았다. 이후 친정 오라버니 집에 의탁하여 지냈다. 본래 바느질 솜씨가 좋아 자력이 생기자 7년 만에 독립을 했다.

48세에 쌍둥이 동생이자 훗날 서울교당 창립요인인 미타원 박공명선 선진과 함께 서울로 이사했다. 이때 바느질로 인연이 되어 선조의 사친인 덕흥대원군의 역대 사손(嗣孫)들의 사저이자 종택인 도정궁(都正宮)에 사는 노대부인의 수양딸이 됐다. 이 부인의 영향으로 불연이 깊어져서 불법승 삼보를 공경 예배했다.

구례 화엄사의 화주가 된 그는 57세(원기8년)에 기차를 타고 화엄사로 가던 중에 전주 근처에서 삼타원 최도화 대호법을 만나 소태산대종사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감복이 되어 대종사를 만나기를 발원했다.

원기9년 2월에 삼타원 최도화 대호법의 안내로 대종사께서 몇몇 제자를 대동하고 상경했다. 이때 대종사를 친견하고 숙겁의 서원을 이룬 듯 기뻐하며 사제지의를 맺고 전무출신을 서원했다. 서울지부 창립 문제로 대종사께서 당주동에 한옥 한 채를 빌려 머무는 동안 시봉을 했다. 이때 육타원 이동진화·구타원 이공주 종사를 비롯한 여러 인연을 인도하여 서울교화의 효시가 됐다.

원기9년 4월29일 불법연구회 창립총회를 마친 뒤 5월에 만덕산에서 선을 날 때 그는 대종사를 시봉하며 대중공양을 맡았다. 그는 익산 본관 건설시에도 물심양면으로 원조를 했다. 또한 동·하선 때는 매년 선비를 마련해 입선을 했다. 선을 나면서도 대중의 신발 씻어주기, 더러워진 옷 빨아주기, 헤진 이불 누벼주기 등 한때도 가만히 있질 않고 자비보살행으로 따뜻한 인정과 기쁨을 주었다.

이처럼 대종사의 제자가 된 후로는 정신·육신·물질을 교단에 온통 바치며 지극한 정성과 신성으로 대종사를 받들었다. 그의 신성과 법열은 〈대종경〉전망품 29장에 잘 나타나 있다. 대종사가 법설을 하면 문정규·김남천 선진과 함께 백발을 휘날리며 춤을 추어 법흥을 돋웠다.

그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교직 없는 교역자로 활동하며 교단 1대내에 575명을 입교시켜 최다 연원자가 됐다. 특히 광주 고외과 병원 댁을 입교시키기 위해서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며 빨래를 하면 빨래를 해 주고, 청소를 하면 청소를 하며, 무슨 일이나 내 집 일처럼 해주는 모습에 감복이 되어 고씨 문중의 어린 아이들까지 입교를 했다.

이처럼 그는 바다같이 너른 자비심과 정성스런 실행력으로 많은 사람들을 감화 시켰다.

원기16년 여자 수위단원이 조직될 때 태방 단원에 내정됐고, 이후 건방단원으로 조정됐다. 원기31년 교역자 강습 중에 그가 몸져 눕자 서로 시탕과 간병을 하려 할 만큼 두루 두루 인덕을 쌓았다.

이런 많은 후진들의 애도 속에 '나무아미타불'을 염송하며 사바를 떠나자 대산종사는 "하늘을 찌르고도 남는 신성 이었다"며 그의 장한 일생을 추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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