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전쟁 당시의 중앙총부.
한국전쟁 때 총부를 수호하다

대산종사는 원평에서 요양하던 중 서울에 가서 잠시 머물다가 한국전쟁을 만났다.

대산종사와 일행은 서울에서 출발하는 마지막 열차를 타고 대전역에 와서 호남선 열차로 갈아타고 총부에 도착했다.

젊은 사람들은 부산으로 피난 보내고 대산종사, 이완철과 송혜환 등 몇 사람이 정산종법사를 모시고 총부를 수호하게 됐다.

전쟁의 열기는 총부까지 밀려와 인민군 부대사령부가 총부에 주둔했다.

정산종법사는 대각전 뒷방 등에서 피난하고 대산종사는 사가에서 운영하는 과수원에 방공호를 파고 피난했다. 때때로 국군 비행기가 총부 주변에서 맴돌다가 이리시내와 군산·전주 등에 폭격을 했다.

전란이 종식된 어느날, 한 비행사가 총부를 방문했다. 그는 정산종법사께 인사를 드린 후, "6.25 당시 이곳에 인민군 부대사령부가 주둔하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에 폭탄을 투하하려고 총부 주변을 몇 바퀴 비행했습니다"라고 하며 "총부에 투하하려고 비행하는데 좋은 서기(瑞氣)가 어려 있어 폭격을 못하고 목천포에 떨어뜨렸습니다"고 말했다.

수위단 중앙위에 피선되다

원기38년에 제1대 성업봉찬사업으로 제1대를 마무리하고 제2대를 출발하며 대산종사가 수위단 중앙위에 피선되었고, 법호를 '대산(大山)'이라 받았으며 교정원장에 취임했다.

원기43년 건강악화로 교정원장을 사임하고 중앙선원장으로 근무하며 정관평 재방언공사 고문으로 영산에 가서 3년여를 요양하며 조력했다.

대산종사는 틈나는 대로 정산종법사가 소태산대종사의 생애를 10상(十相)으로 구분한 내용을 연마했다. 연마하기를 오래 하니 한 구절씩 떠올라 정리해서 정산종법사께 올렸다. 정산종법사가 매우 흡족해하며 "앞으로는 〈정전〉이나 〈대종경〉도 10상처럼 간략히 정리를 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면서 정리해 보라고 했다.

대산종사는 원기46년 여름에 영산에서 나와 전라북도 변산반도 하섬으로 들어갔다. 당시 하섬은 생수가 없어 곤란을 겪다가 우물을 팠다. 대산종사는 "소태산대종사의 은혜가 은생수(恩生水)와 같으니 우물 이름을 은생수라 하자"고 말했다.

대산종사는 하섬에서 〈정전대의〉를 초안하고 〈교리실천도해〉를 구상하여 총부로 돌아왔다.
▲ 대산종사가 〈정전대의〉를 초안하고 〈교리실천도해〉를 구상한 하섬.

신도안을 개척하라는 말씀 받들다

이 무렵 정산종법사는 자주 편찮았다. 제 1대 성업봉찬을 앞두고 발병한 정산종법사의 병세는 날로 악화되어 원기46년 가을, 서울대학교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했다. 간호 차 드나드는 대산종사를 보고 "내 걱정은 하지 말고 어서 내려가 신도안 땅을 준비하라"고 하여 총부에 내려왔다.

계룡산 신도안은 원기21년 봄에 소태산대종사가 이공주·전음광 두 제자와 찾은 곳으로 '불종불박(佛宗佛朴)'이라 새겨진 바위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원기43년 정산종법사는 성정철과 조갑종을 보내 답사하게 하고 이듬해 가을 '불종불박' 바위 옆에 초가집 한 채를 정산종사가 시봉금 일부를 하사하고 보화당과 시내 각 기관의 협조를 얻어 매입했다. 남선교당을 이전하여 '신도교당'이라 이름하고 신도안 개척을 시작했다.

대산종사 일행이 신도안을 찾아가니 심익순 교무가 좁쌀 밥으로 연명하며 신도교당에서 고생을 하고 있었다.

대산종사 일행은 신도안을 둘러보고 돌아와 신도안 개척준비를 하기 위해 경상도지역을 순방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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