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비교무시절에 대산종사로부터 들었던 사리연구에 대한 신년법문은 세월이 흐른 뒤에도 마음에 깊은 울림으로 남아있다. 문(聞) 사(思), 수(修), 허령(虛靈), 지각(知覺), 신명(神明)의 여섯 단계다.

이 법문을 받들던 대중들 모두 어떤 감격같은 것을 느꼈던 기억이 생생하다. 지금도 공부를 돌아볼 때면 '경전 공부를 대강 마친 사람은 의두연마하기를 주의하라' 했던 대산종사의 말씀이 떠오른다. '수행자가 의두가 없으면 깨침도 없다' 한 부촉에 대하여 나는 어떤 각오를 가지고 살아가는가? 아직도 유·무념공부에 정성을 다하지 못하고, 계문을 가벼이 여기는 내 공부와 수행을 돌아보면 수행의 결실을 꿈꾸는 스스로가 부끄러워진다.

대종사는 '노력은 하지 않으면서 성공을 바라는 무리'를 낮도깨비라고 했다. 대산종사는 이와 같은 무리를 도가의 모리배(謀利輩)라고 했다. '개살구 모로 터진다' 하며 환하게 웃었지만 그 말씀의 무게만큼은 가슴에 무겁게 남아있다.

알다시피 우리 회상의 수행교법은 탁월한 점이 있다. 맹목적 호교(護敎)와 자부가 아니라 대종사 말씀대로 성리의 깊이는 불법에 견주어 있고 동양문화의 정수인 유불선 교법을 원만하게 취사선택하여 융섭하였으며 시대를 따라 세간과 출세간, 성과 속을 아우르고 있다는 점에서 빈틈이 없다. 시대를 따라 인류가 일궈낸 수행 전통을 총섭하고 시대를 따라 최적화했다는 점에서 가히 전무후무한 법이라 할 만 하다.

문제는 실행의 정도이며 대중의 수행에 대한 태도의 진지함이다. 교법이 원만하게 갖추어져 있다고 따라서 수행문화가 저절로 훌륭해 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모로 터진 개살구나 모리배가 되지 않으려면 수행의 면면을 돌아봐야 한다. 전통 선방의 안거(安居)에는 '선방의 문고리만 잡아도 제도를 받는다', '선방에는 창문의 창호지도 빳빳이 선다'는 속담도 있다. 물론 우리의 선 수행은 무시선을 주장한다. 이른 새벽 눈을 뜨면서부터 저녁에 잠자리에 들 때 까지 한 때도 놓치지 않고 마음을 챙기며 '온전한 생각으로 취사'하는 마음공부 수행을 한다.

그러나 그런다고 해서 새벽 좌선수행을 대하는 태도의 태만함이 묵인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우리는 경전을 받들어 읽고 연마하는 공이 어느 정도인가? 독경 삼매에 들어 환희를 즐기는 수행자는 얼마나 될까?

수행은 말이 아니다. 글 또한 아니다. 좋은 말들의 나열이나 좋은 문장의 엮음도 아니라는 것이다. 대중을 울고 웃기는 설법의 재주가 아무리 탁월해도 그것이 곧 수행의 정도와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수행은 교전의 해석이 아니다. 교리 해석을 능사로 삼는 공부만으로도 수행의 경지에 이를 수 없다. 선에 대한 지식을 멋지게 설파한다하여 선수행을 바르게 한다고도 말할 수 없다. 의두요목을 잘 풀어 설명한다고 의두공부를 잘한다 말할 수 없다. 대종사는 이미 구미호와 같은 불신과 계교를 크게 경계한 바 있거니와 초창기 무지한 대중을 위하여 법해석을 주로 했던 당신의 교화에 대하여 오해가 없기를 부촉한 바 있다.

이는 비단 출가자의 문제만은 아니다. 물론 출가자의 수행이 재가교도들에게 수행의 본이 된다는 점에서 출가자의 수행 문화는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재가 출가의 수행과 예우를 차별하지 않는 비전 아래서 재가 수행을 어떻게 이끌어 낼 수 있는지 문제는 여간 고민되는 게 아니다.

개교 100년의 가장 큰 과제는 수행에 대한 총체적인 점검일지도 모른다. 수위단회를 비롯한 교단의 지도부가 힘써야 할 가장 시급한 일이 바로 우리의 수행교법을 제대로 자리매김하는 일일 것이다.

<경남교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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