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대종사님께 문안인사 올렸나요?' 내 스스로에게 묻는 질문이다. 직접 친견은 못했지만 늘 대종사님을 가슴에 모시고, 가르침을 잊지 않으며 몸과 마음으로 실행해 나가는 것. 그것이 바로 스승님을 뵙고 받드는 것이 아닐까?

'대범 선이라 함은 원래에 분별 주착이 없는 각자의 성품자리를 오득하여 마음의 자유를 얻게 하는 공부인바…'

〈정전〉 무시선법의 첫 시작인 이 부분을 나는 가장 좋아한다. 읽으며 스스로 대조 할 때마다 대종사님의 사랑과 은혜를 느낄 수 있다.

대종사는 '무시선법'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마음공부를 하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너무나 쉽고 간단하게 가르쳐 주고 있다. 결국 우리의 원래 마음을 알아차리고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대자유인이 되라고 한 것이다.

분별이란 서로 다른 사물을 종류에 따라 나누어 가른다는 뜻이다. 좌산상사는 무시선법 해설에서 구분과 차별의 합성어로 구분하여 차별하는 온갖 계교사량을 말한다고 하였다.

주착이란 마음이 어디에 사로잡힌 모습이다. 우리가 분별 주착에 빠지면 마음의 자유를 잃은 상태이다.

손과 발이 묶였다고 상상해보자. 당장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니 답답하고 짜증이 날것이다. 육신이 묶여 있는 것은 금방 알아차리지만 마음이 묶여있는 것은 잘 발견하지 못한다. 거기다 어느 한곳에 집착까지 되어있다면 더 강한 밧줄로 스스로를 묶어서 결코 빠져 나올 수 없게 되는 것 이다. 그렇기에 무시선의 시작은 분별과 주착이 됨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우리들의 자유를 억압하고 구속하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

"학교요, 공부요, 엄마 잔소리요~" 아니나 다를까, 아이들에게 물어보면 이런 대답이 나온다. 지금 이 순간에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 자체만으로 나에게 안 좋은 것, 나를 괴롭히는 것이 된다.

"그럼 학교도 없고, 공부도 없고, 엄마 잔소리도 없으면 좋겠어?"

"네~"

"정말 학교도 없고, 공부도 없고 엄마 잔소리도 없는 게 좋을까?"

깊이 생각해 볼 수 있도록 시간을 준다. "음 완전히 없어진다고 해서 좋은 것도 아닌 거 같아요."

내가 묶여 있는 분별과 주착을 알아차려도 그것을 바르게 판단하는 힘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은혜를 발견 하기는 커녕 오히려 해독을 만들어내는 무서운 업을 짓게 되기 때문이다.

분별과 주착이 일어나는 것은 나의 몸과 마음이 있기에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진리의 모습이며 인과의 이치이다. 그것을 부정하거나 괴로워하지 않고 받아들이며 신앙해 가는 것이 대종사님을 곁에 모시고 감정 받으며 살아가는 것이다.

대종사님께서 주신 커다란 선물. 은혜(恩). 내 것 삼아서 최고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도 올린다.

<김제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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