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기 공심의 표준인물

방언공사 중에 흙을 나르는 등 고된 노동 가운데서도 소태산대종사께서 "자, 이제 시작하자"하면 제일 먼저 일어나 일을 시작한 초창기 공심의 표준인물로 공중사라면 신명을 아끼지 않은 공심가. 공금을 지극히 아끼며 대종사의 경제적 보좌 역할을 한 사산 오창건(四山 吳昌建, 1887~1953)대봉도.

그는 대대로 불교를 믿어온 불심이 장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특히 부친은 불심이 장해 인근 대절산에 초당을 짓고 수양을 했을 정도다. 그는 대종사의 이웃마을에 살아 잘 아는 사이였으나 대종사가 대각을 이루자 대도회상의 창립취지에 찬동해 제자가 됐다. 제자가 된 이후에는 대종사보다 4살이나 연상이었지만 진흙땅이라 해도 오체투지로 예를 올렸다.

원기2년 7월에 최초 남자 수위단을 조직할 때 진방 단원에 임명됐다. 공석중인 중앙단원의 대리 임무를 맡으며 절약절식, 금주단연, 주경야독으로 초창교단의 기초 작업에 혈심혈성을 다했다.

원기3년 32세에 방언공사와 옥녀봉 아래 구간도실 건축에 흙짐을 나르는 등 고된 일도 마다않고 기쁘게 수행했다. 원기4년 사무여한의 정신으로 창생구제를 위한 기도를 올려 법인성사를 이뤄냈다.

원기4년 10월 대종사가 새 회상 창립의 준비를 위해 봉래산에 입산할 때 정산종사와 함께 월명암 뒷산인 쌍선봉에서 법인기도 해제식을 올렸다.

이후에도 대종사께서 석두암, 만덕산, 내장산 등을 다니며 회상 창립을 준비하는 과정에 험산험로를 막론하고 시봉할 식량 등을 몸소 지고 다녔다.

그는 키가 크고 기골이 호걸다웠으며 기력이 장했다. 모습도 대종사와 비슷해서 얼핏 보면 구분이 어려워 '작은 대종사'라 불릴 정도로 닮아서 대종사의 의복이 몸에 맞아 많이 얻어 입기도 했다. 반면에 천성이 너그럽고, 쾌할 다정해서 전무출신 남녀동지들이 마치 세정을 잘 알아주는 어머니와 같이 따랐다.

대종사를 직접 가까이서 모셨기 때문에 대종사가 교중 일을 감역하는 것을 많이 보아서 그 처사를 익혀서 교중 일에 대한 감역도 능했다. 특히 지방교당 건축시에는 감역을 많이 했다. 서울교당 건축에는 몸소 노동을 했으며, 초량교당 건축시는 밤새 폭풍우속에서 교당을 지켜내기도 했다.

그의 스승에 대한 신성은 지극했다. 서무부장 직에 있으면서도 대종사께서 역까지 짐을 지고 가자해도 기쁨으로 감수하는 무상도인이었다. 대종사께서는 '창건(昌建)'이란 법명을 내렸는데 새 회상 창건에 순일한 공심뿐인 그의 그릇을 보고 내린 법명이었다.

또한 기개가 장대하여 불의나 스승에 대한 무례함 등에는 참지 못했다. 한번은 일경이 대종사의 명함을 함부로 부르는 것을 보고 분개하며 꾸짖은 일이 있다. 이를 본 대종사는 "사람을 교화 하는 사람은 항상 저편을 감화하는데 힘써야 한다"는 법문을 내렸다.(〈대종경〉 실시품 9장)

영산 서무부장, 익산총부 서무부장 등을 맡아 초창기 교중의 어려운 살림을 알뜰히 해냈다.

원기23년부터는 전주·원평교당 교무로 일선교화에 정성을 다했다. 원기29년부터는 총부예감, 감찰원장, 영산지부장 등으로 봉직하며 28년을 교단 창업에 헌신했다. 그는 제1대 성업봉찬회를 앞두고 결산을 보지 못하고, 원기38년 1월에 66세를 일기로 열반의 길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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