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욕계에 산다. 부처님께서는 삼천대천세계가 삼계로 지어져 있는데 그 가장 아래가 욕계라 하셨다.

아래로 지옥이 있고 그 위에 아귀, 수라, 축생, 인간이 있으며 맨 위에 육욕천이 건설되어 있다. 그나마 살만 한 곳으로 인간과 천상이 그럭저럭 바른 생각을 하며 살 수 있는 곳이라는 것이다.

욕계란 무엇인가? 그야말로 욕망이 주가되어 진 강급하는 곳이다. 욕망을 참으면 진급하고 부리면 강급하는 곳, 남의 욕망을 배려하면 천상으로 가고 내 욕망에 빠지면 지옥 간다. 이 단순함 속에서 발견해야 할 것은 삶의 동력이다. 이 세계는 바로 욕망이라는 동력에 의해 건설되고 움직인다는 것이다.

삼세 부처님들께서는 이 욕계 중생을 제도하실 때 사람들을 그 욕망을 따라 인도하시어 마침내 악도 중생을 열반의 해탈경으로 인도하신다.

욕계 ! 욕망에 맞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는 중생들이 사는 곳! 욕망과 관련되면 목숨을 내던지면서 아우성치는 곳! 그러니 욕계에서의 교화도 이 욕심의 문제를 도외시하고는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현대인의 욕망은 무엇일까 ? 교화는 이것을 발견하고 이것을 채워주고 이것을 돌려 마침내 지고지선의 것을 원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 ? 욕망을 떠나서 진리와 법을 이야기하거나 문화를, 인과를 이야기하는 것은 웃긴 일이다. 그냥 에스페란토어 같은 언어를 강조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현실적으로 실현될 아무런 가능성도 없는데 순수한 정신이 그저 괜찮은 것이라고 하여 목청을 돋워봐야 남들이 그저 한번 보고 가는 일일 뿐일 것이니까

현대인의 욕망은 대체로 네 가지 정도로 압축되어 있다고 본다. 첫째가 '돈'이다. 돈은 인간의 거의 모든 욕망을 채워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가 '놀자'다. 어떻게 재밌게, 잘 즐기고 행복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절대적 관심사다. 여기에 방해되면 정신이든 도덕이든 나쁜 것일 뿐이다. 셋째가 '교육'이다. 요즘은 아이들을 하나 또는 둘 낳는다. 그런데 이 아이들이 살기가 녹록치 않고 경쟁력 갖춘 아이들에게 거의 모든 행복의 기회가 돌아간다. 그러므로 자녀를 가진 사람은 목숨걸고 아이들의 교육에 올인한다. 마지막으로 '건강'이다. 그저 보약 한 첩 지어먹고 건강에 기대하던 시대는 아니다. 사람들의 관심은 건강으로 홍수처럼 쏠려간다. 건강과 관련되지 않는 것은 그냥 목가적 시선으로 쳐다볼 뿐이다.

사람들은 자기 욕망에 관심을 갖는데 우리 도덕가에서는 남을 보라고 한다. 희귀할만큼 가끔씩 자기 존재감에 대한 회의가 이는 사람들만 건지려 한다면 남만 보라고 해도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으로는 교화할 생각을 말아야 한다. 물론 이런 사람을 교화하는 사람도 있어야 할 것이다. 전무출신 중에서도 남을 위해서 자기 인생을 완전히 바치겠다는 사람도 흔치 않다. 우리가 출가위인가? 그러고서 무슨 교화가 될 것인가 ?

병원에 들어오는 환자에게 들어올 때 바닥타일이 깨졌다고 혹 진료실에 비가 샌다고 그걸 하소연하는 병원은 한 달이 안돼서 문닫는다.

교당이 어렵다고 교무가 힘들다고 하소연하는 곳에 정신적 위안을 얻으려 오는 사람이 있을까?

온갖 학위를 딴다고 휴학하고 공부하고 기술을 배운다. 단언컨대 정녕 남의 아픔을 내 가슴에 담는 만큼이 교화자의 실력일 뿐이다. 속일 수 없다. 여기서 교화의 꽃은 필 것이다.

<정관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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