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종사가 여러 번 회고한 일화이다. "한남동 남산에 있는 약초관음사(원불교에서 인수 후 정각사라 함)는 당시 일본인 승려들이 관리하는 절이었다.

대종사와 우리 교단을 감시하기 위해 10년을 내왕한 사람이 있었다. 중천 겐타량이라는 조선총독부의 촉탁(囑託)이 있었는데 한국 여자와 결혼해 살고 있었다. 대종사께서 서울에 가시면 꼭 찾아와 감시하곤 했었다. 그런데 일본이 패전하여 돌아갈 때 약초관음사를 맡겨야 하는데 타 단체들을 보았을 때 맡길 만한 단체나 사람이 없어서 그동안 자기가 지켜 본 원불교에 맡기면 될 것 같아 '약초관음사를 맡길 곳은 원불교뿐이다'라고 하면서 스님과 협의해 우리가 불하 받았다. 그런데 차지는 우리가 하였어도 관리를 할 수가 없었다.

당시만 해도 가난하고 민심이 좋지가 않고 법도 제대로 잡혀 있지 않아 도둑이 많아서 하루에도 몇 명씩 찾아와 물건을 훔쳐 가고 괴롭혔었다.

한번은 김대훈이와 여자교무들이 그곳을 지키는데 밤에 강도가 들어와서 대훈을 묶어서 목욕탕에 가두어 놓고 여자교무들의 겉옷을 벗겨 가버렸다. 사정이 이렇게 되고 보니 교단의 많은 사람들이 필요 없는 것이 들어왔으니 다시 돌려주자고 했다. 그때 주산 송도성 종사, 제산 박제봉 교무 등이 같이 있는 자리에서 '그곳에 내가 가서 지켜보겠다'고 하였다. 모두가 몸이 약해서 지킬 수 없다고 걱정을 하였지만 나는 할머니 한 분과 학생 한 명만 같이 있게 해 달라하여 그곳에 가서 살기 시작하였다. 미군들이 버린 옷으로 갈아입고 아주 허름한 모습으로 살고 있는데 아침 저녁으로 도둑들이 들어왔다. 주로 아침 일찍이나 저녁 늦게 왔다. 도둑들이 올 시간이면 문을 활짝 열고 도둑들에게 청소를 하자하여 함께하고 청소가 끝나면 밥을 먹여 보내기도 하고 청소하자고 하면 그냥 도망가는 사람도 있었다. 이렇게 지키는데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다른 방도를 생각해 봤다.

당시 팔타원 황정신행과 함께 보육원을 하기로 하여 어린이들 50여 명을 모집하여 보육원을 시작했다. 이렇게 하니 일반 도둑들은 끊어졌는데 이제는 경찰들이 괴롭혔다. 경찰들이 찾아와 수색한다고 묶어놓고 물건을 훔쳐가곤 하여 도저히 막아내기 힘들어 생각 끝에 박충식 국회의원(경성지부 초대 지부장, 진정리화의 부군)을 통해 이승만 박사와 정치인들을 초대하였다. 이렇게 되니 경찰들도 꼼짝하지 못하고 찾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한남동을 지키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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