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곳 하단에서 삼불이 태어날 것'

 

▲ 복원공사를 통해 초기원형이 복원된 하단성직지 본채건물이다. 갈대지붕 초가는 부산유일의 갈대지붕집으로 알려져 있다.

▲ 하단성적지 법당 내부에는 대종사 당대의 서까래 등 옛 흔적을 더듬어 볼 수 있다.


영남지역 최초의 교화발상지인 하단성적지를 향하는 길, 태풍이 몰고 온 비바람이 지나는 중이었다.
"그래도 참 얌전한 태풍이에요. 이쪽에 낙동강 바람이 불면 대단하거든요. 손님 맞을려고 잔잔하게 비가 내려주네요." 하단성적지 양성원 교무가 염려와 위안의 마음을 전하며 빗 길 손님을 반갑게 맞아줬다. 성적지 대청마루에 앉아 잠시 주춤해진 비를 바라보니 오던 길의 지난함이 잊혀졌다.

대종사의 부산 방문
대종사의 첫 번째 부산 방문은 원기16년(1931) 8월이다. 함께 수행한 조송광 선진은 당시 감회의 글을 통해 "불시창 십육년 팔월초(佛始創 十六年 八月初)에 청(請)함을 받고 종사주 모시고 부산을 가게 되었다. (중략) 우리 조선 유문(唯門)같은 부산항의 온갖 물품 온갖 기술이 많건마는 하필 우리 인류상 대자연의 도만 없다. 전후 좌우로 종사주 특위(特衛)한 남녀노소 태을선궁(太乙仙宮) 하강한 듯 날마다 온갖 법문과 가입서 기재에 분망하다"고 밝히고 있다. 대종사는 조송광 선진과 10여 일간 체류했는데 이 기간 입회한 사람은 '8월13일에 7명, 14일에는 5명, 16일에는 6명, 18일에는 19명에 이른다'고 기록돼 있다.

대종사는 원기19년 10월에 이공주, 신영기 선진과 함께 두 번째 부산을 방문하고 하단지부의 재가임원을 직접 임명했다. 지부장에 양원국(양도신 종사 부친·양성원 교무 증조부)정사, 서기에 양혜성 정사였다. 재가 교도의 지부장 임명은 대종사의 놀라운 혜안으로, 오늘날 교단사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대종사는 원기20년 10월, 하단지부와 남부민지부를 살펴보고 또 초량교당을 신설할 계획으로 세 번째 부산을 찾았다. 이때 초량에서 첫 법회를 보게 된다. 원기25년 10월에는 박창기 선진을 대동하고 하단지부에 머물렀다.

원기26년 10월, 다섯 번째 부산방문에서 대종사는 "이 곳 하단에서 삼불이 태어날 것이다"고 말씀했다. 이밖에도 원기27년에 초량교당에서 목우십도송을 설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이렇듯 하단성적지는 대종사가 여러 차례 부산 방문을 통해 영남지역 교화 근간을 세우고 성혼을 나툰 성적지이다.

▲ 원기18년 삼산 김기천 종사가 팠던 우물은 지금도 요긴하게 쓰인다. 중앙에는 대종사가 드나드셨던 출입문이 보인다.

영남지역의 종가(宗家) 하단성적지
도심에 자리한 하단성적지는 초기원형 건물을 최대한 살려 복원했다. 대지면적 1,353㎡로 갈대지붕 초가집(46㎡)과 역사관(33㎡)이 나란히 위치하고 있다. 갈대지붕 초가는 부산 유일의 갈대지붕 집으로 알려져 있다. 또 마당 한 켠에는 하단성적지 초대교무인 삼산 김기천 종사가 직접 팠다는 우물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원기18년에 김기천 선진이 판 우물이에요. 지금도 봉공회원들이 메주 만들 때, 이 우물물로 콩을 씻어요." 양성원 교무는 '아무리 가물어도 우물이 마르지 않는다'고 전한다. 성적지 앞마당의 잔디 가꾸는 데에도 요긴하게 쓰이는 우물이다.

자연스레 하단성적지의 역사적인 배경으로 이야기가 흘렀다. "대종사께서 법을 제정하시고 삼대 여걸(일타원 박사시화, 이타원 장적조, 삼타원 최도화)을 지방 교화계로 내보내셨어요. 경남 통영이 고향인 장적조 대봉도가 부산에 일원대도의 법종자를 심으면서 영남지역 교화가 시작되지요." 양 교무는 당시 '삼대여걸 장적조 선진'을 교화계에 보낸 대종사의 '탁월한 선택'을 강조했다.

"어느 날은, 일본 순사가 불법연구회 간판을 떼라고 했대요. 그러자 장적조 선진이 '우리 생불님이 달아준 간판을 왜 떼라고 하느냐'면서 일본 순사의 목을 잡았다고 해요." 양 교무는 귀한 일화를 기억해냈다. '동네 아이들이 일본 순사가 오면 울음을 안 그쳐도 불법연구회 할머니가 온다고 하면 울음을 그칠 정도'로 장적조 선진의 여걸 기풍이 당당했음을 알 수 있다.

장적조 대봉도와 양원국 정사의 만남은 영남지역에 원불교의 법맥이 뿌리내리게 되는 역사적 계기가 된다.
당시 하단의 양원국 정사는 매일 천수경 33독을 하면서 10만 독을 목표로 공부하던 독실한 불교신자로, 대종사 법을 전하던 장적조 선진의 노력으로 대종사와의 만남이 이뤄진다. 양원국 정사는 대종사를 뵙고 바로 짐을 싸서 익산(당시 솜리)에서 3개월 동선을 나게 된다.

하단지부에서 빼놓을 수 없는 선진이 김기천 종사다. 김기천 종사는 하단지부 교도들의 요청에 따라 원기17년 4월 초대교무로 부임, 야학을 개설해 경전, 습자, 작문 등을 가르치며 부산지역 사회에 원불교에 대한 인식을 하나둘 심어나갔다. 이러한 노력으로 원기19년에는 남부민지부가 설치되고, 그 기연으로 원기21년 초량지부가 설치됐다. 또 하단지부는 교단의 원로인 양도신 종사, 서세인 대봉도를 배출해낸 교당이다.

복원 공사를 통해 초기 원형건물을 최대한 복원한 하단성적지는 대종사 당대 건물의 서까래 등 옛 흔적을 더듬어 볼 수 있다. 하단성적지 역사관에는 영남지역 교화의 역사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자료가 전시돼 있다. 특히 양혜성 정사가 일제에 빼앗기지 않기 위해 검정 페인트를 칠한 촛대가 보존돼 있어 당시의 상황을 짐작케 한다.

▲ 일제에 빼앗기지 않기 위해 검정페인트를 칠한 촛대.

하단성적지는 영남지역 각 교당에서 재가 출가교도들이 매주 기도순례를 하고 있다. 또 매년 부산 및 영남교화 시초인 하단성적지의 의미를 되새기는 '하단성적지 도보순례'를 실시하고 있다.

하단성적지 양성원 교무는 하단교당 건립을 통해 하단성적지의 복원이 마무리되기를 염원하고 있다. '영남지역의 근본이 되는 교당이니 힘을 합하여 복구하라'는 정산종사의 법문대로, 영남지역의 종가(宗家)를 제대로 복원하는 일은 곧 원불교100년성업의 근본이 됨을 깨닫는 취재 길이었다.

대종사 여러 차례
부산 방문 통해
영남지역 교화 근간 세운
최초 교화 발상지

복원 공사 통해
초기 원형 최대한 살린
하단성적지

영남지역의 종가(宗家)
제대로 복원하는 일
곧 원불교100년성업의 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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