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을 위한 희생적 삶

소태산대종사께서 "어느 국왕이나 재상은 물론이고 당시 조선총독과도 바꾸지 않겠다"고 인증한 오산 박세철(五山 朴世喆,1879~1926) 대봉도.

그는 간고한 가정에서 태어나 비록 학문은 익히지 못했지만 근면하고 부모를 극진히 봉양하며, 형제간에 우애가 두터운 환경에서 자랐다. 매사에 온유 공손하고 겸양한 성품은 언제 어디서든지 모두의 환영을 받았다. 대종사께서 대각을 이루자, 39세에 칠산 유건 대호법의 인도로 집안 아저씨격인 대종사를 찾아가 사제지의를 맺었다.

원기2년 7월에 남자수위단이 조직될 때 손방단원으로 내정됐다. 원기3년 방언공사가 시작되자 구인선진 중에 제일 체격이 작고 약했지만 매양 최선을 다해 일하면서도 공은 항상 다른 사람들에게 돌렸다. 또한 40세라는 최고 연장자로서 힘이 부족해 흙짐을 나르기가 어려울 때는 밥이며, 물을 나르는 등 모든 잔심부름을 연하의 동지들이 시켜도 조금도 싫은 기색 없이 자신의 소임으로 알고 실행했다.

이런 덕화의 기운으로 뭉쳐진 성품은 교중 생활을 하는 동안 '남이 하기 싫어하는 일이나 어려워하는 일'이 있을 때마다 먼저 나서서 해결했다. 그러면서도 자기 자신의 체면에 사로잡히지 않고 사심 없이 주인정신으로 살다간 모습은 그의 숨어있는 저력이었다. 이처럼 이타적 희생정신으로 선행을 실행하는 보살의 천품과 오롯한 신성을 대종사께서도 인증을 했던 것이다.

원기4년 3월 대종사의 지도로 단원들과 함께 창생구제를 위한 기도를 올려 백지혈인의 법인성사를 이뤄냈다. 그 해 겨울에 대종사가 부안 봉래산으로 행가 할 때 동행하며 험한 산길에 고생이 심했지만 대종사를 모시는 기쁨으로 충만했었다.

이후 대종사의 명에 의해 영산으로 돌아와 옥녀봉 아래 구간도실의 수호 책임을 맡아 정성을 다했다. 원기6년 43세시엔 수년간에 걸쳐 다소 저축했던 재산을 모두 교중의 기성조합에 희사하여 정신·육신·물질로 오롯하게 바치는 모범을 보였다.

원기10년 47세 되던 2월에 우연히 내종병(內腫病)에 걸려 위경을 맞았으나 다행히 의료진의 치료로 차도가 있었다. 병고를 치르면서 이번 기회가 세속생활을 정리하고 출가하는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사가를 정리하고 교중사업에 전무했다. 원기11년 대종사와 양하운대사모가 전북 임실에서 잠시 머문 적이 있었다. 이때 팔산 김광선 대봉도와 함께 가사 전반을 돌보는 일을 했다.

그러나 그 해 6월에 다시 전일의 병이 재발해 부득이 영광 자택으로 귀가하여 치료에 정성을 다했으나 효과를 보지 못하고 병근이 점점 깊어만 갔다. 병세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하고 자녀들을 불러 앉히고 "나의 몸과 마음은 공중에 바친지 오래 되었으니 너희들은 나를 사가의 아버지로 알지 말고 사후에도 교중의 지시를 받아 초상절차 등을 신정예법에 의하여 할 수 있도록 하라"고 유언했다.

임종을 앞두고는 지켜보고 있는 정산종사와 삼산종사의 손을 꼭 잡고 비창한 어조로 "불초제(不肖弟)는 대종사님과 사형들을 길이 잘 모시지 못하고 먼저 가니 죄송합니다. 사형들께서는 부디 공부 사업 잘 하시어 인도정의의 기초를 확립해 주시고, 세계문명의 선구자가 되시어, 불초한 아우의 앞길을 선도해 주기바랍니다"며 최후를 부탁한 후 48세를 일기로 열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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