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산의 어머니'

소태산대종사의 열반으로 집안이 암담한 시기와 입정돈망의 시기에 창생구제의 뜻을 남 먼저 알아보고 적극적인 뒷바라지를 했던 첫 여성제자이자, 여성 전무출신1호가 된 선각자. 구간도실 건축과 방언공사 등에 열성을 다해 조력하며, 40여년을 영산원의 안살림을 담당한'영산의 어머니' 사타원 이원화(四陀圓 李願華, 1884~1964) 대봉도.

그는 전남 영산포에서 무남독녀로 태어났다. 몹시 흉년이 든 4살 무렵에 문밖에서 놀다 엿을 사준다는 사람의 등에 업혀 영광까지 가게 됐다. 그 사람은 당시 부호인 김진사를 찾아가 "이 아이는 미천한 집 아이로 부모가 궁색하여 의지할 곳이 없으니 약간의 보상을 주고 길러 주라"고 부탁했다.

청을 들어준 김진사는 아이를 보니 미천하지도, 부모가 없는 것도 아닌 듯 해서 백방으로 수소문했으나 부모를 찾을 길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김진사 부부는 친자식처럼 양육했고, 그도 그렇게 알고 자랐다.

천성이 어질고 너그러웠으며, 활달하여 사람들과 더불어 화하기를 좋아했다. 장성하여 17세에 이르자 장성의 문씨 문중으로 출가했다. 23세까지 안락하고 행복한 생활을 하던 중에 부군이 갑자기 병사하자 비창한 마음으로 영광 친정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친가 역시 부모가 떠나고 살림이 기울자 두 아이를 데리고 날품팔이와 행상 등으로 연명하다 백수면 길룡리까지 들어왔다.

구사고행을 한 후 입정돈망에 든 소태산대종사를 만나 비범한 인물임을 직감하고 일심정성을 다해 부스럼 등으로 험한 몰골의 대종사의 구도를 도우며 시봉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간고한 생활이었지만 노루목 샘터에 단을 만들어 정화수를 올리고, "비나이다. 비나이다. 천지신명께 비나이다. 부디 처사 양반 둘러싼 사마악귀 다 물리치고 병을 낳게 하소서. 우리 처사양반 발복하여 고을원님 되게 하소서"하며 치성을 드렸다.

이를 지켜보던 대종사는 "고을 원님이 뭔가. 신묘생 박처화가 만국 만민 다 구제하고 일체생령을 제도하는 성자되게 해 달라고 비소"라고 했다.

주세불이 출현하여 법륜을 힘껏 굴리고 있더라도 무연중생들은 태어날 수도 없고, 설혹 태어나도 부처님을 알아볼 수 없는데 그는 일찍이 대종사가 도를 구할 때부터 심신을 바쳐 온갖 정성으로 시봉의 도를 다했으니 그 복이 무량하다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대종사께서는 "원화는 숙세의 선연이 심중할 뿐 아니라, 그 발원과 행실이 진급기에 있는 사람이다. 앞으로 이 회상의 발전에 따라 무량한 복록의 주인이 될 것이다"고 이를 증명했다.

대종사의 대각 후에는 더욱 큰 믿음과 기쁨으로 교중사에 협력하며 영산원의 안살림을 하며 모든 노고를 달게 받았다. 원기5년 이후에는 진안·전주·원평·이리등지를 순회하며 순교활동을 했다. 원기9년부터는 영산교당에서 감원과 순교 등을 하며 원기49년까지 40여년을 봉직했다.

뛰어난 음식솜씨와 온화한 마음으로 영산성지의 살림을 알뜰히 꾸려갔다. 특히 거칠고 사나웠던 영산의 인심들이 그의 훈훈한 덕화에 영산 일대는 어머니의 품처럼 훈훈하기만 했다.

"일찍부터 심중에 도사를 만나 도를 배우고 후원하고 싶은 서원이 있었는데 우연히 주세불 대종사를 만나 구도를 돕고, 회상 창립에 행복을 누렸다"고 회고하며 원기49년 80세를 일기로 열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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