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숨결 〈정전〉

근원과 전체를 살펴 지금 상황 고려해 흐름 읽어내야
머리로 알되 몸으로 스며들어 배어나야 참된 앎

불가에서는 예로부터 수행하려면 일을 놓아야 한다고 했다. 수행에 전념해도 깨닫지 못할 것 같거나 절을 운영하며 수행승 돕는 것을 보람으로 삼는 스님을 사판승(事判僧)이라고 하는데 절간에서는 왠지 낮게 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경제의 논리가 득세하는 요즘에는 인기가 꽤 높다. 반대로 수행에만 힘 쓰는 승려를 이판승(理判僧)이라고 하는데 돈은 없지만 여전히 존경받는 분위기다.

그러나 원불교에서는 수행과 일을 하나로 보고 수행이 일로 이어져야 온전하게 여긴다. 즉 이판과 사판을 아울러야 너른 세상을 위하는 공사판(公事判)이 될 수 있다.

사(事)라 함은 일을 일컫는데 그 일에는 인간의 시비이해(是非利害)로 옳고 그르고 이롭고 해로움이 따른다. 이 일은 이(理)라는 우주의 이치인 대소유무(大小有無)에 의한 것으로 본다. 대라함은 근본과 전체, 소는 현상과 개체, 유무는 변화와 유기체다.

즉 천조의 대소유무를 알아서 인간의 시비이해가 건설되는데 대소유무에 맞으면 '시'가 되고 '이'가 되나, 대소유무에 의해 왜곡된 반응을 하게 되면 '비'가 되고 '해'가 된다. 일의 근원과 전체를 살피고 지금의 상황과 특성을 고려해서 조화와 흐름을 읽어낸다면 바른 판단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충분한 지식이나 경험 없이 관념과 욕심으로 외골수적인 판단에 의해 성급하게 움직이면 일을 그르칠 수밖에 없다. 반대로 시비이해 속에도 진리가 있는 것이라 시비이해의 내용과 결과를 살피고 되짚어가면 대소유무의 내용이 풍요로워지고 또한 온전하였는지도 되돌아보게 되어 실용적으로 계발된다.

이것을 불법으로 생활하고 생활에서 불법을 닦아가는 길이라 일컫는다. 그 공부는 일 없을 때는 경전, 강연, 회화, 의두, 성리, 정기일기 등의 공부를 주로 하고, 일 있을 때는 생활을 경전 삼아 살피고 대조하고 감정을 얻어가며 이루어간다.

이치를 따라 일을 성립해 가고 일로써 이치를 돌아보는 것을 머리로만 알아서는 안 된다. 가슴으로 내려와야 한다. 머리로는 이해되어 구분하고 응용할지라도 가슴으로 느껴 솟아나지 않으면 진정으로 아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말로는 청산유수인데 막상 선택의 기로에 서서는 진리에 의한 마음보다 관념과 욕심에 따른 선택을 한다면 그것은 아는 게 아니라 생각의 유희에 지나지 않았다는 증거다. 머리로 이해한 것이 가슴으로 내려오면 꿈에서도 그 생각을 떠나지 않기 마련이다.

또한 가슴으로 내려왔다고 해서 완전하게 아는 것은 아니다. 몸으로 스며들어 배어나야 한다. 동물적 감각으로 이어져 반응으로 나타나야 비로서 참으로 알았다고 할 수 있다. 몸으로까지 배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아직 미진함이 있다는 뜻이다. 생각이 확고하면 가슴에서 울리고 몸으로 반응한다.

<성주삼동연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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