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원상의 진리라야
천지개벽을 할 수 있고
세상의 혁신을 할 수 있다


不 啻如掌中之珠 時或藏之則不曾生不曾滅 其痕跡 不可見不可量 放之則充滿於法界 連續無量世界 無始曠劫 無邊衆生 又用心則天開地闢 革世濟衆 任意自在 如此之佛佛祖祖密密意 如何鑿得 頓畢了 我等衆生衆生之 不可量得磨者 是也夫 然得有一門三鍵 曰觀空養空行空 得有一個主人公 曰一心精功之士 能開得入 願諸我等九分無明衆生之類 聞此法門 不生怯弱 奮發大志 世世生生時時處處 心念口說身行 皆入此門 證入無餘涅槃 得通大解脫無碍大通門 永爲不退轉.

"뿐만 아니라 손바닥 가운데 구슬 같아서 때로 자취를 감추면 생멸이 없어 그 흔적을 볼 수도 헤아릴 수도 없으며, 놓으면 법계에 가득하여 한없는 세계와 영원한 세월과 수많은 중생이 이어지며, 마음을 쓰면 천지를 개벽하고 세상을 혁신하며 인연 따라 중생 제도를 마음대로 하나니, 이와 같은 모든 부처와 조사들의 깊은 뜻을 어떻게 꿰뚫어 알리오. 우리 모든 중생이 가히 사량으로 얻지 못할 것이 이것이로다. 그것을 얻는 데는 하나의 문에 세 가지 열쇠가 있으니, 첫째는 관공(觀空)이요, 둘째는 양공(養空)이요, 셋째는 행공(行空)이니라. 또한 그를 얻는 데에 한 주인공이 있으니 일심으로 공을 쌓아 나가는 사람이라, 능히 그 문을 열어 그 집에 살게 될 것이니, 원컨대 어리석은 우리 중생들은 이 법문을 듣고 겁을 내거나 약해지지 말고 분연히 큰 뜻을 발해서, 세세생생 시시때때로 마음으로 생각하고 입으로 말하고 몸으로 실행하여, 다 이 문에 들어서 무여 열반의 자리를 증득하고 대해탈 무애 대통문을 열어 길이 퇴전하지 말지어다."

참 이 구슬은 신기하기도 하다. 감추려 들면 일찍이 생한 바도 없고 멸한 바도 없어서 그 흔적이 묘연하다. 볼 수도 없고 헤아릴 수도 없다.

대산종사가 깊은 병중에도 굴하지 아니하고 주야를 가리지 아니하며 마음을 살피다가 문득 깊은 삼매에 들어 얻은 진리의 체성이 그렇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마음을 펴서 드러내면 세상에 가득하다.

시간과 공간 모두가 이 진리 아님이 없다. 사사물물의 모든 존재가 다 이 진리의 나타남이다. 처처불상이다. 이 원상(圓相)의 진리라야 가히 천지개벽을 말할 수 있고 세상의 혁신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개벽이 작란(作亂)이 아니라 참 개벽이 되고 혁신이 구호가 아니라 참 혁신이 되려면 이 진리에 뿌리 해야 가능한 것이다. 이른바 묘용(妙用)이다. 그런 이유는 간단하다.

체성과 묘용은 불이(不二)요 상즉(相卽)의 관계다. 시간과 공간으로 구성되는 우주와 그 안에 모든 존재는 다 우리 본성의 드러남이기 때문이다. 이 깊은 뜻을 아는 이 과연 누구인가? 세속의 진리와 안목으로는 단언컨대 알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 공부의 요령이 곧 삼학(三學)이니 여기에 더 이상 계교와 의심이 없어야 한다.

대산종사는 훗날 '교법의 선언'이라는 법문을 통해서 '삼학팔조의 원만한 수행은 만생령 부활의 원리요 대도(大道)'라고 천명하신 바 있다.

지금 세상은 바야흐르 개벽기에 있다고 말한다. 새회상 원불교 존재 의의는 개벽의 사명에 있다. 대도(大道)를 발원하고 일심(一心)으로 공을 들이는 선비가 그 핵심이다.

깨달은 이가 없다면 세상은 공각(空殼)이요 개벽은 헛된 구호에 다름 아니다.

<경남교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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