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사 봉래 정사에서 모든 제자에게 말씀하시기를 "옛날 어느 학인(學人)이 그 스승에게 도를 물었더니 스승이 말하되 '너에게 가르쳐 주어도 도에는 어긋나고 가르쳐 주지 아니하여도 도에는 어긋나나니, 그 어찌하여야 좋을꼬' 하였다 하니, 그대들은 그 뜻을 알겠는가" 좌중이 묵묵하여 답이 없거늘 때마침 겨울이라 흰 눈이 뜰에 가득한데 대종사 나가시사 친히 도량의 눈을 치시니 한 제자 급히 나가 눈가래를 잡으며 대종사께 방으로 들어가시기를 청하매,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나의 지금 눈을 치는 것은 눈만 치기 위함이 아니라 그대들에게 현묘한 자리를 가르침이었노라."

월초기도를 마치고 교도들과 안성 바우덕이 축제를 갔다. 오랜만에 전통춤과 풍물패의 묘기를 봤는데 군무로 추는 북춤의 진취적이고 힘 있는 기상이 감명 깊었다. 또 외줄타기를 하는 여린 아가씨의 일심재주에 감동을 받았다. 외줄위에서 꽃발을 서거나 공중으로 뛰거나, 왼쪽 오른쪽 걸치기를 하거나 책상다리를 하거나, 모든 동작이 마쳐지면 반드시 줄 위에 사뿐히 멈춰 절도 있는 동작으로 마무리를 했던 점이 인상 깊었다. 마치 성리의 세계가 희노애락에 물들지 않는 것으로, 착 없는 심신작용으로 그 정수를 삼듯이 그 어떤 묘기도 절도 있는 멈추기에 바탕 한다는 것을 배울 수 있었다.

13장 내용에서 가르쳐 주어도 도에는 어긋난다는 것은 성리의 진경이 언어도단의 입정처이기에 그 어떤 말로도 그 자리에 맞지 않다는 말씀이요, 설혹 성리를 깨친 분의 법문이라 할지라도 참법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성리품30장에 대종사께서 하열한 근기를 위하사 한 법을 일렀다는 표현을 한 것이라 생각된다. 말과 글과 생각이 돈연히 끊어진 절대처이기에 가르쳐주어도 도에 어긋날 뿐 아니라 그렇다고 죽은 자리도 아니요, 그 고요한 체성에 만물이 바탕하였기에 만물이 진리의 간섭을 받지 않을 수 없으며 유무를 초월해서 여여히 존재하므로 우리의 신앙과 수행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가르쳐주지 아니하여도 도에는 어긋난단 말씀은 스승으로서 제자에게 진경을 열어주고 싶은데 말로써 가르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니, 그렇다고 스승의 도리로써 아니 가르칠 수도 없고 제자에게 스스로 깨달을 것을 촉구하는 자비의 법문이 아니겠는가.

이에 대종사께서는 직접 눈을 치시며 제자들에게 현묘한 자리를 무언으로 가르쳐 주었다.

때로는 말로써, 혹은 글로써, 우주만유의 본래 이치를 가르쳐 주었는데 이제는 몸으로써 무언으로 직접 표현한 것이다. 눈을 친다는 것은 평범한 일상사를 무언으로 보여준것이다. 현묘한 자리가 이 몸을 떠나서 있는 것이 아니고, 평범한 일상의 육근 동작 속에 현묘한 자리가 둘이 아님을 보여준 것이다. 그럼으로써 활불의 표본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었고 참 진경은 말과 글에 있는 것이 아님을 가르쳐주었으며, 우리가 말과 글에 떨어지지 않게 해준 자비법문이라 생각된다.

기흥교당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