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여대에서 학술대회가 있었다. 첫날, 아는 길이지만 미리 대중교통과 소요시간을 확인했다. 둘째 날, 돌아오는 길에 2호선 사당역에서 과천에 가려고 4호선 안산 방향으로 갈아탔다.

그때 앞에 어르신들이 "의정부가 집이다. 중간에 어디서 갈아타냐"는 얘기가 들렸다.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교무니까. '가르치기에 힘쓰는 교무', "저기 어르신, 지하철 잘 못 타신 것 같아요." 그 순간, 지하철 방송이 들렸다. "이번 역은 이수역, 이수역입니다." 아차 싶었다. 이수역은 사당역보다 북쪽이다. 내가 잘 못 탄 것이다. 지하철에서 얼른 내렸다.

내가 틀리고, 어르신들이 맞은 것이다. 잘 타신 어르신들을 '구해줄려고' 의기양양하게 말을 꺼낸 내 마음이 보였다. 부끄러운 마음과 당황한 마음 사이로 웃음이 나왔다. '하하하, 그 어르신들과 나 사이에 누가 틀렸을지도 모르는데, 나는 무조건 맞고, 어르신들이 틀렸다고 단정 지은 것이다. 어제 오늘 세 번이나 다닌 길이지만, 한 순간 부주의, 방심이 남쪽과 북쪽을 거꾸로 본 것이다.

대산종사는 "천지의 중간에 인간이 있고 부모, 동포, 법률 사이에서 우리가 살고 있으며 또한 현실 세계는 서로 다른 입장이 양립(兩立)되어 상대하고 있다."〈대산종사법문2집 제4부 신년법문 화동하는 길〉

현실 세계는 시비이해의 일로써 운전해 가는 세상이다. 각자의 시비이해를 따라 서로 다른 입장이 되어지는 것이 이치의 당연함이다. 나는 옳고, 저 상대는 그르고, 우리의 입장은 옳고, 저들의 주장은 틀린 것이니, 결국 상대는 없어져야 할 대상, 없애야 할 것들이라는 마음을 먹게 되면 상극의 화를 면하기 어렵게 된다.

부부, 부모와 자녀, 직장의 상사와 직원, 정치, 종교를 막론하고 두 사람 이상이면 '나와 너', '내 것과 네 것', '내 편과 네 편'의 관계가 나타나고 생겨나고 드러나게 된다. 그게 바로 일원상의 진리장이다.

따라서 서로 입장이 달라지고, 시비이해가 있어지는 것을 진리의 작용으로 기꺼이 믿는 것이 일원상의 신앙이다. 또한 동시에 그 경계를 따라 있어지는 그 마음을 일상수행의 요법 9조에 대조하여 '세우고, 제거하고, 돌리는' 공부가 일원상의 수행으로 볼 수 있다.

잘못 탄 지하철에서 내려 다시 갈아타고 돌아오는 길에 비가 시원하게 내렸다. 순간 실수 덕분에 '어르신들이 잘 못한다는 편견, 내가 맞다는 아만심'을 발견하였고, 실수를 통해 내 마음을 만나고 공부하는 기쁨을 느꼈다.

'지혜는 어리석음을 먹고 자란다'는 넉넉한 공부심으로 어리석은 만큼 자성의 혜가 밝아지고, 그른 만큼 자성의 계력이 쌓이는 게 일상생활 속 마음공부의 힘이다.

/과천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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