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숨결 〈정전〉

수행자의 보은은 내생에 영화 누리자는 것이 아님
보은하는 자체가 영성을 풍요롭게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몸이 있어 수행과 보은활동을 더욱 잘할 수 있다. 몸은 불편하지만 수행에 필요한 아주 유용한 도구다. 영혼만으로 존재할 때는 자기가 좋아하면 돌아볼 겨를없이 그곳에 이미 도착하여 수행할 틈이 없다. 하지만 몸이 있으면 생각하고 행동에 옮기기까지 틈과 과제가 있어 생각을 거듭하며 되돌아보고 행동할 수 있다.

그렇다고 몸이 수행과 보은의 순일한 도구만 되는 것은 아니다. 동물로서 갖게 되는 생명보존과 종족번식 그리고 인간이 갖게 되는 윤택한 삶과 후대의 환경 발전에 이르기까지의 기본욕구들이 강해서 수행과 보은은 커녕 욕구에 휘둘리기 일쑤다. 기본욕구는 수행의 문에 들어 해야 할 것에 나태심으로 주저앉히고 조용히 마음을 길들여야 할 때에 무료함으로 오히려 일 저지르게 하는 골칫거리다.

몸에 예속된 욕구를 떨구지 못하고 오히려 구차함으로 낙을 삼는 이유는 심안(心眼)이 아닌 고깃덩어리의 눈인 육안에 함몰되기 때문이다. 욕구가 좀 더 기승을 부리면 부족함에 열등감이 생기고 풍족함에 오만방자하여 주위 사람들과 끊임없이 좌충우돌하며 번뇌를 양산한다. 그러나 심안이 뜨이면 골칫거리인 이 몸이 영적성장을 해가는 데 유용한 도구가 되고 사회라는 것이 내 마음의 거울이자 내 영성을 풍요롭게 하는 마당이 된다.

마음이 몸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다면 마음의 힘이 굉장히 큰 사람이고, 이 몸의 정보를 넘어서 영적 성장에 초점을 두는 사람은 하늘사람이다. 하늘사람은 인간의 척박한 삶을 영적 성장의 도구로 사용할 뿐 인간의 범주에 함몰되지 않는다. 없어도 당당하고 있다고 해서 우쭐하지 않는다. 겸손해서가 아니라 영적인 삶에 그리 중요하지 않음을 아는 까닭이기 때문이다. 이 마음에서 바라본 겸손은 오히려 그 속에 숨겨진 상(相)과 사치스런 모습으로 부끄러운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

마음가짐은 그 깊이와 횟수에 따라 몸에 스며들기 마련이다. 그래서 마음가짐 하나를 조심하게 되고 마음가짐이 몸에 어떻게 스며들 것인지 생각하게 된다. 뒤집어 생각해 볼때 몸에 스며들지 않은 마음가짐이라면 온전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수행이란 결국 좋은 습관 길들이기다. 인생의 마지막에 남는 것도 마음의 습관과 몸의 습관이다. 그리고 죽어갈 때는 마음의 습관만이 남는다. 그 마음이 자기의 영적 수준을 가늠하는 잣대이자 삶을 형성한다. 항상 빈 마음을 바탕 삼고 그 일에 진리의 흐름과 세상을 읽으며 삶을 맛깔스럽게 요리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것이 우리가 수행하는 이유다.

수행자가 보은하는 것은 내생에 영화를 누리자는 욕심이 아니라 보은하는 자체가 내 영성을 풍요롭게 하기 때문이다. 영성이 풍요롭다는 것은 그 만큼 자유롭다는 것을 뜻한다. 그 자유는 우주를 품는다.

<성주삼동연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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