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공심으로 일관한 삶

'고지식하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교법에 근거한 생활 태도로 일생을 살아가며, 교단을 향한 일편단심으로 공명에 따른 교화자. 출가 후 50여년을 임지마다 자비훈풍을 불리며 대신성과 대공심의 표준으로 일관한 현산 조지성(賢山 趙智聖, 1934~2003)대봉도.

그의 부친은 교당을 찾아 두 번이나 이사할 정도로 신심이 깊었다. 이런 가정 분위기는 자연스럽게 원불교 정서에 젖어 들게 했다. 이런 환경은 후덕함과 인정이 넘치는 온유 자상한 성격을 소유할 수 있게 했다. 두 번째 이사는 영광 녹사리에 도양교당이 생기자 9세 되던 해에 이사하여 그곳에서 성장했다.

그러나 영광초등학교 4학년 때 사랑하는 어머니가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평소에 어머니는 남을 도와주기를 좋아했다. 세상을 등지게 된 연유도 폭설을 피해 잠시 집에 들렀던 보따리장수의 짐을 날라주고 오다가 폭설로 길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이후로 아버지의 지도아래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원기35년 17세 되던 해에 도양교당 교무인 향산 안이정 종사의 안내로 좌포교당에서 간사생활을 시작했다. 야학을 통해 마을 어린이들을 가르치며 담임교무의 지도에 절대적으로 따르며 지냈다. 이런 중에 한국전쟁이 일어났는데 와중에 교무가 병이나 요양을 할 때 혼자서 1년 동안 교당을 수호했다.

3년의 좌포교당에서 생활을 마무리하고 수계농원으로 옮겨 4년을 주경야독하며 간사생활을 마치고, 원기42년 24세의 늦은 나이로 동산선원에서 수학을 했다. 원기46년 졸업과 함께 수계농원 교무로 발령이 났다. 인삼농사를 담당 하게 되었는데 경험이 없었지만 정성을 다한 결과 그 소득으로 논 100두락을 매입했다. 이를 기반으로 은산육영재단을 발족하게 하는데 큰 힘을 보탰다.

원기52년 평소 꿈꾸어왔던 교화현장인 백수교당에 부임했다. 청년교화에 주력하며 전무출신 배출을 염원한 끝에 기재원·기정현 자매를 출가시켜 교단의 동량으로 성장하게 뒷받침해 활발한 교화활동을 펼치고 있다. 원기56년에는 영산사무소로 발령이 났다. 영산성지 발전 계획안을 만들 기회가 주어졌다.

장차 세계인들이 참배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비행장까지 담은 계획안을 구상했다. 원기 57년 다시 교화장인 감곡교당에 부임했다. 한글학교를 운영하는 등 활발한 교화활동을 펼치는 한편, 교당부지 마련을 위해 심혈을 다해 국가소유지를 불하받았다.

이후로 원기59년 춘천교당, 원기62년 익산교당, 원기74년 교동교당, 원기76년 남원교구장 및 교감, 원기81년 김제지구장 및 교감 등을 역임하며 교화에 열정을 쏟았다.

춘천교당에서는 법당증축공사를 하고, 교도법위향상에 노력했다. 특히 교도소 법회를 활발히 전개해 그 공로를 인증 받아 표창을 받기도 했다. 익산교당 봉직시엔 북일·도원교당의 연원이 되어 설립했고, 신용협동조합 운동에 뜻을 두어 임원교육 등을 받고 원불교중앙신용협동조합을 설립하는데 일조했다.

김제교당에서는 교당과 어린이 집을 신축하고 청소년교화활성화와 지역사회에 도움을 주는 교화를 펼치며 마지막 열정을 쏟았다. 이후 교화부 순교감과 중앙신협 지도교무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

이처럼 그의 일생은 오직 이 공부 이 사업에 열성을 바친 대공심의 생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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