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사 봉래 정사에서 문 정규에게 물으시기를 "벽에 걸린 저 달마 대사의 영상을 능히 걸릴 수 있겠는가" 정규 사뢰기를 "능히 걸리겠나이다"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그러면 한 번 걸려 보라" 정규 곧 일어나 몸소 걸어가거늘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그것은 정규가 걷는 것이니, 어찌 달마의 화상을 걸렸다 하겠는가" 정규 말하기를 "동천에서 오는 기러기 남천으로 갑니다"하니라.

문정규 선진은 법호가 동산으로 봉래정사 시절 친구 송적벽의 인도로 대종사를 찾아 뵌 후 제자가 됐다. 이 장에서는 초창기에 대종사께서 제자들에게 성리문답 해준 생생한 일화가 엿보이는 내용이다. 또 스승의 질문에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답하는 동산선진의 기백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성리는 심상에서 두 가지 특징을 갖고 있다. 하나는 분별없는 자리라는 것, 또 하나는 분별없는 자리에서 분별이 있어지는 점이다. 분별없는 자리는 성품의 체자리요, 우주만유의 근원이며 제불제성의 심인이며 일체중생의 본성으로 모든 존재가 평등한 자리며 나아가 우주만유가 하나인 자리이다.

벽에 걸린 달마대사의 영상을 걸려보라는 말씀은 '죽은 달마대사를 살아나게 하여 영혼을 불러내라'는 말씀이 아니고 '우주만유가 하나인 자리'에서 달마대사와 동산 선진의 성품을 묻는 질문인 것이다. 그래서 동산 선진은 몸소 걸어가는 것으로 둘이 아닌 하나임을 답하였다. 여기까지만 하여도 전래되어온 불가의 화두문답에서는 '각'이라고 인증하고 도인이 났다고 야단법석을 떨었을 것이다. 그런데 대종사는 정규가 걷는 것이니 어찌 달마의 화상을 걸렸다 하겠느냐로 한 번 더 쐐기를 박는 질문을 던졌다. 이는 과거불가에서 각이라고 인증하는 방법의 얇음을 알았기에 한 번 더 깊숙이 찔러줌으로써 확철대오(廓徹大悟)의 진경에 이르지 못한 제자로 하여금 그 진경에 직입할 수 있는 디딤돌을 만들어준 것이다.

성리라는 것이 공부의 깊은 단계는 아니지만 공부의 초보자에게는 자신이 어떤 단계인지, 어느 정도 공부가 되어 가는 지, 스스로 알지 못하므로 공부가 조금만 되어도 스스로 공부가 다 된 것 같은 착각을 할 때가 무수히 있게 된다. 이럴 때 스승의 지도가 없으면 허송세월하는 것쯤은 대수롭지 않은 것이다. 스승이 있어도 공부길 잡는 것이 쉽지 않은데 대종사께서 자수 자각한 일생은 상상을 초월하는 희유한 일임을 세월이 지낼수록 느끼게 된다.

마지막으로 동산 선진이 "동천에서 오는 기러기 남천으로 간다"고 했다. 〈한울안 한이치〉에서 이 내용에 대해 다른 제자가 정산종사께 "견성을 하고 한 말이냐"고 묻자 "잘 모르겠으나 좀 보였는지 모르지, 견성은 확철대오 해야한다"고 답했다. 정산종사의 이 법문을 받들며 모골이 송연해지는 느낌이다. 나 같은 하수도 진경에 이르지 못한 것이 보이는데 상황은 잘 모르겠다 하며 좀 보였는지 모른다는 말씀은 만능 만지를 갖추고도 함부로 하지 않으면서 견성은 확철대오 해야 한다는 핵심을 짚어준 혜안이기에 마냥 배우고 싶고 따르고 싶고 품에 안기고 싶을 뿐이다.

<기흥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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