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사 봉래 정사에 계시더니 선승(禪僧) 한 사람이 금강산으로부터 와서 뵈옵는지라, 물으시기를 "그대가 수고를 생각하지 아니하고 멀리 찾아왔으니 무슨 구하는 바가 있는가" 선승이 사뢰기를 "도를 듣고자 하나이다. 도의 있는 데를 일러 주옵소서"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도가 그대의 묻는 데에 있나니라" 선승이 예배하고 물러 가니라.

아침좌선을 마치고 하는 산행은 우주의 대기와 하나 되는 호연지기의 청정세계를 열어준다. 선명한 단풍이 함께하는 가을산은 '도가 어디에 있는가'라는 자문에 절로 '여기 단풍에 있지요'하는 답을 주었다. 그러면 도는 단풍에만 있는가, 산하대지 모든 것에 도가 있지 않은가? 그 뿐이랴 유형 무형이 도 아님이 없건만 대종사께서는 어찌 그대의 묻는 데에 있다고 하였을까.

'도가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을 진리가 어디에 있는가라고 바꿔보면 훨씬 더 가깝게 우주만유가 보이고 변화하는 작용이 보인다. 〈수심결〉에서 보조국사는 성품이 어느 곳에 있느냐는 질문에 작용하는 곳에 있다고 하는 답이 나온다. 이처럼 사시순환하는 우주만유는 순환 이치따라 다양한 계절의 변화로 우리의 눈을 시원하게 해주고 그 변화에 따라 우리는 무한한 감동을 받게 된다. 또 어린아이는 때 묻지 않은 성품으로 우리를 정화시켜 주며 얼마전 개기월식이 있었을 때 우주쇼라고 하며 얼마나 경탄을 하였는가 이렇듯이 작용하는 모든 것은 변화를 동반하여 우리의 시선을 끌고 작용의 신묘함에 탄성을 짓게 한다.

이 모든 현상은 그 기저에 공적영지와 진공묘유라는 본래 성품이 들어서 만들어내는 조화물이다. 우주는 우주심이라 할 수있는 진공묘유의 조화요. 인간은 본래 성품인 공적영지의 산물로 일체유심조의 심과 하나이다. 원효스님은 구도할 때 캄캄한 밤중에 분별없이 마시매 해골물이 시원하였고, 이튿날 밝은 아침에 눈을 떠보니 해골물이라 구토를 하였던 것이야말로 일체유심조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화이다.

선승이 금강산에서 봉래정사까지 찾아옴은 구도의 정열이 상당히 있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에게 도가 그대의 묻는데 있다는 것은 언하에 분별이 끊어지게 하여 공적영지의 자성을 회광반조하게 하는 직구라고 볼 수 있겠다.

대종사께서 상근기는 일원상만 보고도 입문을 할 것이요, 다음 근기는 교전을 보고서 알아 볼 것이라 하셨다는 얘기를 들었다. 우주만유가 도로써 느껴지는 근기는 삼라만상으로부터 법설을 들을 것이요, 다음 근기는 큰 스승의 지도를 받은 후 선승처럼 회광반조의 기틀을 타고 눈치를 챌 것이다.

원효스님의 해골물, 일체유심조 잘 보여줘
분별사량 끊어진 공적영지의 자성이 곧 도(道)


<기흥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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