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재양성과 개척불사에 헌신

'사심없이 온통 바치면 이뤄진다'는 신념으로 교당과 기관을 창립해온 개척자. 교화현장에서 후진양성에 전력을 기울이고, 영모묘원 건설에 혈성을 바쳐 선진제위의 보본사업에 공덕을 나툰 균타원 신제근(均陀圓 辛濟根, 1923~2013) 종사.

그는 배움에 대한 욕구가 강했다. 그러나 유가의 풍습인 여성이라는 이유로 배움의 길이 막혔다. 남에게 지지 않으려는 강열함과 부지런함은 간이학교에 갈 수 있었으나 얼마못가 폐교가 됐다. 불행 중 다행으로 읍내 보통학교에 편입해 다니게 됐다. 즐겁게 학교를 다니던 중 어머니가 열반하자 모든 집안일을 살펴야했다.

졸업 후 어떻게 하면 공부를 더 할 수 있을까를 궁리했다. 친구가 영산에 가면 공부를 할 수 있다는 말에 의기투합하여 영산을 찾았다. 학원생들이 공부하는 모습을 보고 졸업하면 이곳으로 오리라는 다짐을 했다. 절호의 기회가 왔다. 아버지가 일본으로 출타를 했던 것이다. 열일곱 되던 원기23년 봄, 가출을 시도했다.

총부도량은 도화 꽃이 만발해 무릉도원을 방불케 했다. 부산 출타중인 소태산대종사는 뵐 수 없었으나, 선방에 참여해 강의를 들었다. 주산종사가 정기일기를 써내라 했다. '깊은 숲과 같은 사람이 되어 많은 사람이 쉬어갈 수 있게 하는 인물이 되고 싶다'고 썼는데 3갑을 받았다. 신이 나서 용기백배해 있는데 아버지가 찾아왔다. 이로써 9일 동안의 짧은 총부생활이 끝나고 말았다.

얼마 후 '법명이 나왔다'는 소식이 왔다. 부산 출장에서 돌아온 대종사께서 그의 소식을 전해 듣고 '제근'이라는 법명을 내려줬다. 집안에서는 시집을 보내려고만 했다. 그러나 마음은 오직 출가뿐이었다. 원기25년 11월 모든 준비를 하고,'어차피 떠날 사람이니 찾지 말라'는 편지를 남기고 영산선원으로 향했다. 1년 가까이 생활을 하는 동안 네 차례나 데리러 왔지만 요지부동했다.

이를 본 정산종사는 "제근이는 똥통을 지게해도 변하지 않겠다"며 총부로 보내줬다. 이때 대종사를 처음으로 대면했는데 "주먹만 하다마는 장차 큰 인물이 되어 호강을 받을 텐데"라며 "제근이는 전권이 딸을 해라"해서 공타원 조전권 종사의 은녀가 됐다.

원기27년 대종사께서는 "전권이를 따라 초량으로 가라"했다. 도시로 가는 것을 망설이자 대종사는 관촌교당으로 보냈다. 공양원으로 교화를 도우며 농사일은 물론 부역에 동원 되는 등 많은 어려움 속에서 3년을 보냈다. 원기31년 유일학림에서 3년을 수학했다. 이 기간에 법종자를 키웠다. 특히 정산종사의 정전 강의를 통해 진리·법·회상·스승에 대한 사대불이신심이 확고해졌다.

졸업 후 신태인·용각·운봉·완도·교동·대전·초량교당, 부산교구장, 영모원장 등을 역임했다. 교화현장에 있는 동안 공주·남대전·함양·영주·용각교당 등의 연원교당을 설립했다. 특히 교동교당에서는 인재양성에 전력하여 40여명에 이르는 출가자를 배출하는 공덕을 쌓았다. 이밖에도 부산교구장시엔 삼동원과 제주국제훈련원 불사에 적극적인 협력을 했다.

원기70년 영모원장에 임해서는 5만여평의 황무지를 타고난 부지런함과 성실함으로 개간해 선령들의 안택을 마련하고 추원보본의 효를 다했다. 말년에 찾아온 병고에도 불구하고 자력생활의 강한 의지로 기도정성과 감사생활로 적공하며 생사바다를 유유히 건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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