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직 없는 순교무로

교직 없는 순교무로 각지를 돌며 사무여한의 정신으로 일원대도 선양에 앞장선 개척자. 소태산대종사를 주세불로 받들며 한번 맺은 신의를 지키며 혈심혈성을 바친 이타원 장적조(二陀圓 張寂照,1878~1960)대봉도.

그는 경남 통영에서 출생했다. 비교적 부유한 집안에서 구김 없이 성장하여 16세에 이웃 마을에 사는 이씨 문중으로 출가했다. 넉넉한 살림에 부족함 없이 살았으나 선천적으로 남성적인 성격을 타고난 그는 가정이란 틀 속에서 사는 것이 구차하고 답답하기만 했다. 30세 무렵에 '운명을 스스로 개척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단호히 집을 떠났다. 처음에는 장사모양으로 전라도를 돌아다니다 증산도로 흘러들어 신봉했다. 이런 중에 원평에서 완타원 이만갑 선진을 만나 생불님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 원

기6년 그의 안내로 변산 봉래정사에서 대종사를 친견하고 귀의하여 전무출신을 서원했다. 대종사가 생불임을 확고히 믿고 돌아와 교당설립을 계획했다. 교도를 모으고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농사일과 행상 등을 하며 교당창립에 앞장섰다

그의 신바람 난 순교활동은 교단 창립에 혁혁한 공적으로 남아있다. 원평에서는 익산총부 건설의 주역인 서동풍·서중안 선진을 인도했다. 또한 귀의 전에 믿었던 태극도의 신도들도 개종시킬 정도였다. 그의 법명은 처음에는 '풍(風)'이었다. 신바람이 나서 무분별하다 할 정도로 교화 하는 모습을 보고 대종사께서는 "장풍이란 법명을 뺏아야겠다"며 마음을 비추는 공부를 하라는 뜻으로 '적조'란 법명을 내렸다.

원기14년 봄부터는 부산에서 일원의 법종자를 뿌리기 위해 순교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쳐 부산교화의 시조가 됐다. 부산교화의 시발점이 된 양처사를 입교시킨 일화는 특별하다. 양처사는 십수년을 불교에 심취해서 신앙해왔는데 당시 불교의 타락상에 실망에 빠져있었다. 이 소식을 듣고 문지방이 닿도록 드나들며 일원대도를 열렬한 언사로 설명했다.

이에 양처사는 '어찌하면 여성의 입에서 저런 좋은 법문이 나올까? 저런 제자를 만든 선생은 누굴까?'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궁금증을 풀기 위해 양처사는 총부를 방문해 대종사를 만났는데 한눈에 석가세존을 만난 듯 감복하여 귀의했다. 그가 바로 하단지부(현 당리교당) 창립의 주인공인 래산 양원국 선진이다.

원기16년 가을에는 대종사를 초청해 부산 땅을 처음으로 방문할 수 있게 했다. 대종사께서 머무는 동안 40여명이 더 입교해서 회원 수는 80여명에 이르렀다. 원기17년에는 삼산 김기천 종사가 부임하여 오늘 날의 부산교화에 이르게 하는 시발점이 됐다.

부산교화에 머물지 않고 원기21년에는 북방으로 진출해 청진에서 7명을 입교시키고, 원기22년부터는 북만주로 이동해 선양, 길림, 목단강, 장춘, 연길 등을 순회하며 많은 회원을 입교시키는 공적을 나퉜다. 이런 힘을 바탕으로 목단강에 교당 건물을 준비했으나 세계대전이란 비상시국으로 인해 총부로 귀환했다.

비록 학문은 없었으나 수화불피하는 사무여한의 정신으로 여성의 몸으로 원평, 서울, 대구, 부산, 청진은 물론이고 국경을 넘어 만주에 이르기까지 일원의 법음을 전했다. 제1대내 연원자만도 189명에 이렀다. 국내외를 넘나들며 교화활동을 한 그는 원기45년 중앙수양원에서 82세를 일기로 열반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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