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고신의'맹세한
정산종사의 대신성 깃든 곳

▲ 성주성지는 넉넉하고 편안하게 순례객을 맞이 한다.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성주 성지로 들어서는 길, 울긋불긋 단풍 길이다. 성지에 우뚝 선 소나무 아래에도 바람에 날린 단풍잎들이 사뿐히 내려앉았다. 가지마다 늘어진 감나무도 가을 물을 듬뿍 머금었다. 넉넉하고 편안하게 순례객의 마음에 위안 전하는 성지의 가을 풍경이다.

대가람의 성주성지
먼저 대가람의 면모를 갖추고 있는 성주성지 대각전으로 향했다. 참배의 예를 올리고 거북바위 기도터로 갔다. 거북모양의 이 바위에서 정산종사는 "후일 천하 창생을 제도하는 사업을 이뤄서 그 빛난 이름이 영원한 세상에 유전되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였다고 한다.

'대장부가 마땅히 공중사에 헌신 봉공해 그 은혜가 천하 만민에게 골고루 미쳐 가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며 정산종사가 불멸의 서원을 세우고 기도했던 거북바위. 인고의 시간 비바람을 견뎌낸 거북바위는 정산종사의 구도일념 장엄함이 서려있는 듯 했다.

거북바위에 정화수를 놓고 '창생을 제도하는 큰 사업'을 이루고자 기도한 '구암기원상(龜巖祈願相)'을 한참 동안 마음 안에 그려보았다.

▲ 정산종사가 불멸의 서원을 세우고 기도했던 거북바위.

최고의 법 영접할 초전교당
성주성지 김원명 교무와 함께 초전교당으로 향했다. 초전면 동포리에 소재한 초전교당은 김 교무가 일심으로 관리하고 있는 곳이다. 땅을 매매하고 건물을 짓기까지 7년여의 시간을 오롯하게 공을 들였다. 지금은 매주 금요일 법회를 진행하며 교도들과 함께 봉불을 준비하고 있다.

"좌산종법사 당시, 원기100년을 앞두고 정산종사 고향에 교당 간판이라도 걸어야 한다는 말씀을 받들었다"는 김 교무는 "십년 넘게 매달 10일, 정산종사 추모법회를 진행해왔다. 여러 스승님들의 시봉금이 종잣돈이 돼서, 초전지역에서 최고의 스승과 최고의 법을 영접할 땅을 7년 동안 찾고 알아봤다"고 전했다.

2640㎡ 규모의 초전교당은 법당과 생활관, 앞 뒤 정원까지 정갈하게 관리되고 있었다. 나무 한 그루, 돌 하나 까지 김 교무의 살뜰한 보살핌이 닿아있는 초전교당. '최고의 스승과 최고의 법을 영접할 교당'을 염원했던 그가 지난했던 인고의 시간 속에 일궈낸 값진 결실이다. 초전교당을 일구면서 '정산종사의 성안이 두 번이나 보였다'는 그는 모든 일의 성사가 스승의 호념과 은덕이었음을 대변했다.
▲ 정산종사가 스승으로 부터 유학을 배웠던 고산정 백세각. 종손인 송만수(오른쪽)씨가 17년 째 관리해 오고있다. 김원명 교무(가운데)가 이날 성주성지를 안내했다.

고산정 백세각
발길을 고산정 백세각으로 옮겼다. 고산정은 정산종사 부친인 구산 송벽조 대희사가 결혼할 때까지 역대 선조들이 대대로 세거하였고, 그 종친들이 오늘날까지도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 있다. 정산종사는 살아 생전 당신 고향을 묻는 이 있으면 '성주 고산정'이라고 답했다고 전한다.

백세각은 현재 종손인 송만수 씨가 17년 째 관리하고 있다. 송만수 종손이 백세각을 안내했다. 그는 "이 건물은 460여년 됐다. 중간에 보수를 했지만 전형적인 조선중기 양반집 형태이다"며 '3.1운동이후 성주의 독립운동과 관련이 깊은 집'임을 언급했다.

백세각은 1919년 파리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화의에 우송한 전국유림대표 137명의 서명으로 한국독립을 호소했던 '유림단진정서'를 작성했던 곳이다.

또 4월10일 성주장날 만세운동을 모의하면서 태극기를 만들어 보관했던 곳이기도 하다. 독립운동의 거점지였던 백세각은 경상북도 지방문화재 제163호로 지정돼 있다.

초전면 소성동 정산종사 탄생가로 향했다. 정산종사가 탄생하고 구도했던 소성동은 달뫼(月山· 일명 달마산)가 병풍처럼 둘려 쳐 있다. 정산종사는 9세까지 이곳에서 자랐다고 한다.

정산종사가 탄생한 방에는 정산, 주산종사의 진영이 있어 순례객들이 참배를 올리고 있다. 김 교무의 알뜰한 손길에 볏짚으로 이엉을 얹은 지붕이 정갈했다.

다시 성주성지 대각전으로 돌아와 김 교무와 소나무 길을 걸었다. 성지가 대가람으로 변모하기 까지 겪었을 숱한 어려움, 그러나 그는 '전혀 힘든 것이 없다'는 상 없는 텅 빈 마음이다.

그는 "성지에 살면서 힘든 것은 없다. 성지의 기운을 체 받으면서 스승들의 호념과 호법 속에 살아가는 은혜로운 삶이다. 단지 내 능력이 부족해서 더 잘 운영하지 못하는 것이 죄송스럽다"고 속내를 전했다.

그는 "14년 동안 살면서 성지의 나무 한 그루 , 흙 한 줌, 돌 하나 까지 제자리를 찾은 것 같다"며 "이제는 사람들이 내 고향자리가 여기구나 하고 느낄 수 있는 성지가 돼야 한다"는 생각이 확고했다.

그간 해온 활불훈련을 정법에 맞춰 기질도 변화하고, 진리에 맞는 행위를 통해 신명을 뽑아내고, 법과 길들여져서 생활을 선도하고, 이런 것이 완벽한 표준이 될 수 있는 성지를 만들고 싶다는 것이다. 성지를 활불도량으로 만들고자 하는 그의 생각은 한 치의 흔들림이 없었다.

울타리 있는 성지가 아닌, 자연이 감싸주고 자연 전체가 성지인 이곳에서 그는 진실 되게 내실을 키우고 싶은 바람이다. '완벽한 스승과 완벽한 법'이 있는 한, 변치 않을 김 교무의 마음이 강직했다.

'만고신의(萬古信義)' 맹세한 정산종사의 대신성이 깃든 성주성지, 그 간절함으로 내 마음도 깨어나기를 합장했다.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