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종사가 백범 김구와의 인연을 '구도역정기'와 종법사 시절 여러 번 다양하게 회고한 일화이다. "백범 김구 선생과는 유난히 자주 만나게 되었는데 물론 이승만 박사의 소개도 있었지만, 팔타원(황정신행)님께서 부군인 강익하 선생을 통해 많은 이야기를 하셨던 것이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백범 선생과 강 선생은 사제지간이었다.

한남동 정각사에 처음 백범 선생이 오셨을 때 일인들이 쓰다 남은 의자가 하나 있어 그 자리에 모시려고 했더니 백범 선생은 극구 사양하셨다. 하나밖에 없는 의자 거기는 내가 앉아야 한다면서 자기는 청법자(聽法者)라고 하셨다. 그리고는 꼭 존경어를 쓰셨다. 나는 민망해서 '아버지 같으시니 말씀을 낮추십시오'라고 했더니 백범 선생은 아니라고 하시면서 '종교인은 어디까지나 정신의 지도자인데 그렇게 세속인들처럼 함부로 말을 낮출 수는 없습니다'라고 하셨다. 때때로 머리 아픈 일이 생긴다든지 틈이 나면 한남동에 오셔서 쉬고 가셨던 백범 선생님, 그분은 상해임시정부 시절의 이야기를 밤늦도록 목 메이시며 들려 주셨고 거기에 모인 우리 교역자들에게 붓글씨도 써 주셨다.

어느 날은 예고도 없이 백범 선생이 오셨다. 생신을 맞이하여 주위의 술렁거리는 눈치를 보고 이곳 한남동으로 오셨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상해시절 주위의 동지들이 어머님 생신을 맞아 돈을 드리면 어머님은 그것을 모아 독립자금에 보태라고 내놓으셨다고 말씀하시며 내가 어찌 생일상을 받을 수 있겠느냐고 하셨다. 더구나 우리나라 형편이 안정이 안 되고 남북문제가 해결이 안 된 상태에서 그럴 수는 없다고 하셨다. 그리고 우리에게 밭에 있는 콩잎을 쪄 된장과 함께 주면 좋겠다고 하시면서 '만일 시장에 반찬을 사러 가는 일이 있으면 나는 이대로 일어날 것입니다'라고 하셔서 있는 그대로를 대접하였다. 어느 때는 맹장염으로 수술한지 일주일이 된 며느리를 데리고 오셔서 '이 사람 누울 자리 좀 마련해 주시오'하시고는 한동안 요양하게 하셨다.

소탈한 서민의식,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는 생명을 걸었던 애국지사, 천추만대에 그 이름은 영원히 빛날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훌륭한 어른을 대접하면서 특별히 신경 쓸 일이 없었다. 그때 한남동 주변에는 복숭아밭이 있어 여름이면 거기서 따온 복숭아를 대접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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