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교화의 효시

젊은 시절 독립운동에 투신해 상해임시정부 독립자금 모금활동을 하다 실형을 살고 출감 후 전국을 순회하다 소태산대종사께 귀의한 독립유공자. 원기20년 일본 대판교당 교무로 봉직하며 일본교화의 효시가 된 영산 박대완(靈山 朴大完, 1885~1958)대봉도.

그는 전남 여천에서 출생했다. 목포에서 일신학교를 졸업하고, 13세 되던 해에 일본 교코의 도립 제2중학교에 입학했다. 졸업 후 동경기상대에서 3년여의 수습근무를 마치고 인천관측소와 목포측후소에서 근무한 엘리트였다. 이후 측후소를 사직하고 농장지배인과 곡물상 등을 하는 중에 일제의 강압에 항거하기위해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국가기록원과 보훈처에서 공개한 판결문에 보면 그의 독립운동의 이력은 분명하다.

그는 상해임시정부 자금조달을 위한 활동을 하다 1919년(원기4년) 10월에 서울에서 검거되어 대구교도소에서 2년 7개월의 수감생활을 하고 출소했다. 당시 사건은 상해임시정부 자금조달을 위한 중국화폐위조 사건이었다. 서울의 안우선, 정태영과 공모하여 중국 길림성에서 통용되는 중국지폐50조권 5만 여장을 인쇄 중에 검거됐다.

1922년 38세 되던 해에 출소하여 부모님이 있는 영암에서 농사일을 돌보다 만주일대와 전국을 순회했다. 원기12년 열차편으로 집으로 가던 차안에서 알고 지내던 목사를 만났다. 이야기 중에 '지도받을 수 있는 인물을 소개해 주겠다'며 소태산 대종사를 소개해줬다. 그는 익산에서 하차하여 총부를 방문했는데 동선 중이었다. 3일을 기다렸으나 대종사를 만날 수 없자 돌아가려던 날에 대종사의 부름을 받았다.

대종사를 뵙는 순간 억겁의 숙연인 듯 일시에 파란만장했던 인생을 청산하고 전무출신의 길을 가기로 서약했다. 당시43세로 6세 연하인 대종사의 제자가 된 것이다. 그는 일어, 만주어, 러시아어 등에도 능통했고, 신학문에 대한 식견이 대단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내세우지 않고 대종사의 지도에 순응했다.

일제치하의 풍운아였던 그는 원기13년 44세에 농업부원이 되어 근무를 시작했다. 똥지게를 지고 신명나게 염불을 하며 누에를 치고 '알봉'에 박을 심어 박 장사를 하는 등 대종사의 훈증아래 영육쌍전 수련을 부지런히 했다.

원기17년에 원평교당 초대교무로 부임했다. 원기20년, 대종사의 하명으로 일본 대판교당 교무로 의욕적인 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일제의 감시와 방해로 1년 만에 귀환하게 됐다. 원기21년 용신교당 초대교무로 봉직하고, 원기24년에 정수위단원 보궐선거에서 태방단원에 선임됐다.

그해 마령교당에 부임해 3년을 교화했다. 원기27년에 다시 용신교당에 부임해 10여년을 농촌 개선 활동에 앞장섰다. 예회 날이면 사방 십리 밖에서 도시락을 싸들고 모인 교도가 300여명에 이르렀다. 농촌지역 교화를 주로 하며 농촌계몽과 개량 등을 조직적으로 진행하며 상록수와 같은 역할을 했다.

그는 원리원칙에 입각한 합리적인 일처리를 하면서도 유연성이 뛰어났다. 그러나 일제의 강압에는 언제나 단호했다. '구주이신 대종사'란 가사 때문에 일제는 부르지 못하게 했지만 굴하지 않고 법회 때마다 부르는 의기는 두려움이 없었다. 그는 대종사께서 제자로 받아준 것에 대한 감사와 보은으로 최선을 다한 일생을 살다가 원기43년 말년의 수양을 즐기다 열반 길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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