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숨결 〈정전〉

은혜는 수행의 부산물일 뿐 집착하지 말아야
결과 두고 볼 때 은혜를 입는다고 표현


수행자는 은혜를 입으려 하지 않는다. 은혜를 입고자 하는 즉시 욕심의 굴레에 들어가 집착의 틀을 만들어 그 속에서 지옥을 만든다. 은혜는 수행의 부산물일 뿐이다.

어느 지역에서는 석존성탄절에 절 세 곳을 찾아서 연등을 단다. 그래야 하고 있는 사업도 잘되고 복도 받는다는 속설 때문이다. 그 불심의 바탕은 복 받기 위해서다. 복을 받아도 크게 받을 수 있는 복전으로 어느 한 곳보다는 여러 곳이 낫기 때문에 대중이 있는 곳과 못자리가 될만한 교육이나 교화현장이 있다. 나아가 법 있는 수행자라면 더 말할 나위없는 복전이라 돕는데 마다하지 않는다. 조금 더 지혜로운 사람은 복을 짓는 것도 나무에 거름하고 묻어주는 것처럼 내색하지 않음으로써 효과를 높인다. 하지만 이것도 욕심에 기반한 것 이상은 아니다.

인간의 세계도 이 욕계에 속한다. 인간으로 살아보니 살만하기 때문인지 욕심의 굴레를 애써 넘으려 하지 않는다. 그동안 복을 많이 지었어도 조금만이라도 불이익으로 다가올 때 진리나 법은 아랑곳없이 이성을 잃는 것을 보면 그렇게 생각된다. 마음에는 복을 얻고자 하는 욕심이 있기 때문이고 그 욕심에는 상대심이 있어서 욕심대로 되지 않으면 화가 치밀어 상대가 되는 곳에 퍼붓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진정한 수행자는 복을 지으려고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은혜마저 구하지 않는다. 수행자에게는 마음이 진급에 있다. 진급하려고 하면 그 구성요소에 포용력이 있다. 즉 천지, 부모, 동포, 법률의 은혜에 보답하는 마음에서 우러나는 포용력이다. 이 마음에는 미움이 없다. 이정도는 수행을 조금만 해도 되나 더 어려운 것은 애착을 떼는 거다. 사랑마저 떼야 소유가 아닌 존재가 된다. 존재의 사랑에는 소유에 따른 욕심이나 집착 없이 상대의 행복을 위한 배려만 있다. 한국의 명문대를 졸업하여 대기업에 다닌다는 준수한 용모의 한 중년 남자가 찾아왔다.

"결혼도 하지 않고 한 여자만을 바라보고 살아왔는데 그녀는 주변에 있는 내가 불편하다니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녀를 사랑하기보다는 내 속에 담긴 마음을 사랑하는 것이니, 그녀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녀가 바라는 것을 해주며 행복을 빌어주세요"라고 하니 그렇게 해보겠단다.

영혼의 진급에 필요한 포용력은 사은 보은을 통해 생긴다, 보은으로 은혜를 입으려는 것이 아니라 보은의 마음이 포용력이다. 포용할 수 있는 내 영혼을 사랑하기에 보은할 뿐이다. 즉 복 지으려는 게 아니라 건넬 수 있는 내 마음을 사랑하여 건네는 것이라 내색할 게 없다. 저절로 상없는 복이 되어 은혜가 찾아올 뿐 도모하지 않는다. 수행은 자기 영혼을 사랑하는 데에서 시작되어 세상과 더불어 하나로 이어질 따름인데 결과를 두고 볼 때 은혜를 입는다고 표현했을 뿐이다.

<성주삼동연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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