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략)···대종사 말씀하시기를 "나를 보았으니 무슨 원하는 것이 없는가." 그가 사뢰기를 "저는 항상 진세에 있어서 번뇌와 망상으로 잠시도 마음이 바로 잡히지 못하오니 그 마음을 바로잡기가 원이옵니다."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마음 바로잡는 방법은 먼저 마음의 근본을 깨치고 그 쓰는 곳에 편벽됨이 없게 하는 것이니 그 까닭을 알고자 하거든 이 의두를 연구해 보라" 하시고 "만법귀일하니 일귀하처오"라고 써 주시니라.

성리품에 가장 많이 나오는 법문이 만법귀일이다. 번뇌와 망상으로 마음이 바로 잡히지 않음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공붓길을 묻는 사람에게 의두의 처방을 내준 문답 속에 의두가 모든 분별을 쉬게하는 '쇠수세미'라는 전래의 공부법임을 확인케 해주는 법문이다.

출가 전, 대학에 낙방을 하고 집근처 송광사에 법정스님을 찾아 잠시 들린 적이 있다. 그때 설 무렵이었는데 스님은 떡국을 끓여주며 '이 마음도 없는 것이다'라고 했다. 속으로 난 깜짝 놀라 어떻게 마음이 없을까? 다른 표현을 하려고 하였는데 말이 잘못 나온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 마루에 앉았는데, 맑고 파란 하늘에 구름 한 점이 걸려 있다 점점 흩어지는 것이었다. 순간 나도 모르게 '스님말씀이 저것이구나' 마음도 본래 없는 것이었구나 하고 실증과 동시에 없다는 무상에 빠지게 되었다.

그리고 일년 후 〈원불교교전〉의 인과품을 읽고 눈을 번쩍 뜨게 되었다. 성품의 체성에 분별이 없다고 하여 없는 것에 빠지면 무상한 세계에 하염없이 들어가게 되고, 인생이 허무하게 느껴진다. 그러므로 없고 없되 유무를 초월해서 분명하게 있는 진공의 체성에 인을 쳐야만 변함이 없는 자기정체성을 확립하게 된다. 그래서 성품을 참 나라고 한 것 같다. 이 참나가 확립되지 않으면 인생의 어느 고비에서건 경계따라 흔들리게 되고 뒤집어지는 일이 다반사다. 그러므로 성리공부가 안되면 나이 들어도 애기라는 법문을 했다는 생각이다.

현실은 끊임없이 복잡다단한데 그 많은 변화를 포용할 기준점이 없으니 항상 한편에 편착 되는 것이 우리 중생의 특징이다.

만법이 모든 현상세계와 마음에 있어 분별심을 상징한다면 귀일은 현상세계를 있게하는 근본성품이며 분별이 끊어진 진공의 체성이다. 만물이 진공의 체성에 한 기운으로 절대의 세계를 이뤘기에 진리는 하나요 세계도 하나이다. 그 가운데 매하지 않는 영지하나가 독로하여 영겁에 짓고 받는 삼천대천 인과의 세계를 전개하고 있다. 귀일이 진공이요, 성품자리이기에 다시 그 하나가 돌아간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없고 없는데 무엇이 돌아간단 말인가. 다만 일귀의 진공에서 본래 갊아져 있는 정신이라는 묘유가 생하여, 인연과로써 짓는 대로, 즐겨하는 대로 마음과 분별의 인과의 세계, 묘유의 조화를 무궁하게 전개할 뿐.

<기흥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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