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기98년 5월은 나의 신앙생활에 큰 터닝포인트가 된 시점이다. 인사동 인사아트센터에서 개인전을 하고 있어서 분주한 나날을 보내던 중 문화사회부로부터 원무지원을 권유 받았다. 자신은 없었지만 교당 교무의 추천을 받아 원무신청을 했고, 새로운 재가교역자의 길에 들어서게 됨에 설렘도 컸다.

나는 입교한지 13년이 넘었지만 학교수업과 작품 전시일정에 쫓겨 법회출석 의무만 겨우 지키고, 연원교화를 위해 제자들을 유인(?)해 1년에 4~5명씩 입교시키는 정도의 교도였다. 그러나 전공이 서예인지라 자연스럽게 원불교문화예술총연합회 미술협회 서예분과 이사를 맡게 됐고, 문화행사 및 전시회에 참여하게 되면서 원불교문화의 정체성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당시는 주로 전시와 문화체험 행사 등에 국한됐지만 횟수를 거듭할수록 원불교문화 창출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게 됐고, 그동안 입교시켰던 연원들이 모두 문화 예술인이었다는 점에서 문화교화의 희망을 꿈꾸게 됐다.

그리하여 1년에 수십 차례의 그룹전과 개인전에 원불교법어를 소재로 한 작품을 주로 출품해 원불교를 알리려 했고, 금니(金泥)와 은니(銀泥)로 법문사경을 하고 변상도를 그리는 작업에 심취하게 되었으며, 모필로 정전을 사경하는 작업을 진행하여 법어서예전과 사경전을 갖기도 했다.

이러한 관심은 대외적으로 진행되는 공식적인 행사로 이어져 대각개교절 문화체험행사에 서예과 학생들을 데리고 대종사, 정산종사, 대산종사의 묵적을 석각(石刻)하여 탁본행사를 진행했다. 또한 원불교스카우트의 종교심포지움 로고제작 및 전시회, 어양교당 문화프로그램 진행, 사단법인 솔솔송자원봉사대에서 어르신 문화교실과 복지회관 서예지도 봉사 등을 하면서 문화교화의 절실함을 더욱 깊게 체감하고 이를 강조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활동과정에서 원무제도를 알게 된 것이다.

원문예총 연말행사장에서 문화사회부장께서 '문사부에서도 원무가 나왔으면 좋겠다'는 말을 듣고 늘 뇌리에서 맴도는 단어가 되었다. 신심도 부족하고 봉사할 시간도 여유롭지 않아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하다가 원무지원을 하게 되니, 오히려 신심은 더욱 높아졌으며 원무활동을 통해 많은 문화예술인들을 입교시킬 수가 있었다.

문화사회부 소속 첫 원무로서 자긍심도 있었지만 원무훈련을 받으며 선배원무들의 활동 현황을 듣고 감동과 긴장이 교차했다. 각자의 직장인 학교, 경찰서, 군대, 교도소, 스카우트, 교당 등에서 상 없이, 깊은 신심으로 주인의식을 갖고, 자발적으로 교화 활동을 전개하는 모습을 보고 안일했던 자세를 반성하며 원무로서의 사명을 다졌다. 또한 법동지들과의 소통과 공유는 공부심을 더욱 진작시켰다.

원무의 역할에 대한 정확한 사전 지식은 없었지만 출가교역자를 도와 교화 일선에서 빈마음으로, 신심으로 즐겁게 임하면 족하리라 생각했다. 원기98년, 미주선학대학원 발전을 위해 52점의 서화작품을 기부하며 해외교화에 조그마한 도움이 되었을 때 가장 큰 보람을 느꼈다. 원문예총에 소속되어 원불교 문화예술의 발전과 새로운 패러다임 구축에 정진하는 재미도 크다.

원불교 문화의식 고취를 위하여 마련된 일원갤러리에서 오늘도 원불교 전시문화의 지평을 열어간다는 감사 일념으로 하루 하루를 맞는다.

<어양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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