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공부의 또 다른 이름은 '시기·질투와의 투쟁' 아닐까. 나보다 공부도 못했던 고교 동창은 잘생긴 남편과 살고, 뭘로 보나 내 자식보다 못한 친구 아들이 고시를 패스하고, 내가 가르친 후배가 초고속 승진으로 더 큰 차를 사는 일들이 왕왕, 그것도 나한테만 일어나는 것. 그 경계를 알아채고 맞서는 일이란, 웬만한 '사촌의 땅 구입'에도 꿈쩍않는 마음의 근육 키우기다. 이 시기·질투에의 승리는, 개인을 넘어 우리 사회의 심각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대책이자 예방법일 것이다.

그런데 이 마음공부의 메카인 교단에서 오히려 시기와 질투에 지고마는 일들을 본다. '누구 하나 좀 잘 나면 그 꼴을 못 본다'는 얘기는 더 이상 감출 수도 없는 진단이다. 소외당하거나 별종 취급을 당하고, 더러는 대놓고 내쳐지기도 한다. 당사자 속내야 안그렇겠지만, 주변 사람들에게는 그 시기와 질투도 느껴지고, 모른 척 되려 험담하는 것도 보인다. 잘 하고 있는 사람을 모델 삼아 따라가도 모자랄 판에, 박수나 칭찬도 못 보내는 참으로 못난 처사다.

침체 분위기 속에도 희망은 있고 꽃은 핀다. 척박한 교화 현실 속에서도 교도 수 불리는 교당도 있고 출가자들 낳는 교무도 있다. 교도들에게서 한 마음으로 존경받는, 이웃종교인까지도 교당 문턱 넘게 해 입교시키는 교도들도 있다. 모두 이 회상에 한 자락이라도 보은하고자 노력해온 결실이다. 결국 교화의 새바람은 이 결실이 더 확대되고 영글어야 불어오는 것이다.

그런데 왜일까. 창의적인 생각과 혁신적인 실천으로 조금 앞서 가면, 우리는 헐뜯고 깎아내리기에 급급하다. 아주 개인적인 결점이나 '교화만 하느라 어디에 소홀하다' 같이 억지 꼬투리들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갑자기 동료 교무, 교도에서 심사위원이자 감시자로 변한다. 남들이 해왔던 방법과 조금 다르면, 마치 '내놓은 자식'처럼 너 알아서 해라다. 사실 교단 밖에서도 인정받는 '스타교무' 중에 교단이 키우고 보듬은 사람이 얼마나 되며, 교화 잘 하고 교도 늘리는 교무 중에 교단에서 밀어준 사람 얼마나 될까.

누군가 잘하면, 그만큼 못하는 내가 부끄럽고 속상해서 그 사람을 미워한댔다. 교당이든 교무든 각자의 사정이 있는 법, 어디보다 못한다고 지레 겁먹지 말자. 잘 하는 사람 모셔와 노하우를 듣고 속속들이 활용하자. 수험생들은 수십, 수백만원을 들여 좋은 대학 간 선생에게 공부비법을 배운다. 세상은 이미 잘 하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려 발버둥을 치고 있다. 우리의 교화는 어디서 배워올 것인가. 이미 검증된 '잘하는 사람들', 차 한잔으로도 기꺼이 비법을 알려주고 이끌어줄 스승들이 이미 우리 주변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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