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주의(Structuralism)는 매우 폭넓은 지적 분야를 포괄하는 이론으로 1950~60년대 제3세계의 경제발전 문제에 대한 문제의식으로부터 출발했다. 저개발 혹은 저발전은 사회 정치적 개혁과 효율적인 경제 전략을 통해 해결될 수 있다고 본 자유주의자들의 근대화 이론의 예측과 달리 후진국들에게 발전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을 뿐더러 국가 간 격차는 더욱 커져갔다.

이에 많은 중남미의 경제, 사회, 역사학자들은 이러한 저발전에 대한 자유주의적 진단과 처방을 부인하고 구조주의 이론을 등장시킨 것이다. 정치적 부패나 자본부족 그리고 합리적인 경제정책의 결여 등과 더불어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적 구조와 전체 세계를 분석의 단위로 보아 해결할 문제를 찾으려 함으로써 구조주의 또는 글로벌리즘이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의 교화 정체 현상에 대해서도 교단 내외를 통해 재가 출가 구분없이 다양한 의견을 내고 다양한 방법을 찾으로 하고 있다. 그동안 수많은 정책들이 총부로부터 지방으로 전달되고 시도되며 많은 고민들을 함께 해왔다. 일본은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을 아베노믹스를 통해 엔화 무제한 방출로 출구를 찾는 것처럼 보인다.

중국 시진핑 주석의 찌그러진 얼굴과 박근혜 대통령의 무시 등 각국에서 비난을 톡톡히 받으면서도 자국 내에서 우경화 바람은 강력한 추진력을 얻고 있다. 우리에게도 '원불교의 잃어버린 30년'이 눈 앞에 실존으로 있고 그간의 노력만큼 패배의식이 자라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우리 내부에서 강력한 '원불교 아베노믹스'를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아프고 실랄하게 말하겠다. 교단의 모험없는 떼우기식 정책들, 여러 번의 실패 경험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들이대는 교화단을 통한 교화에 대한 집착, 기업운영처럼 목표 설정만을 집요하게 요구하고 종교적 특수성과 교무 또는 교도 개인들의 특성에 대한 몰인정, 시대 정서와는 반대로 나아가는 집회 선호적 정서, 그리고 통계 용이성과 단기간 시각적 효과에 대한 욕구로 인해 집행부의 집착적인 행사 계획, 추진, 대중동원이 성과로 평가되는 구조. 뭔가 움직이는 것에 대한 갈애(渴愛)마저 보인다. 이 모든 것들은 '잃어버린 30년'이 만들어낸 부작용일 것이다.

세계 경제는 재원의 부족에서 소비자의 부족으로 돌아서면서 불황이 오기 시작했다. 물건이란 이미 어떤 종류, 어떤 부분에서도 넘쳐 흐른다. 생산자가 넘치기 때문에 실직 사태가 오는 것이다. 물론 이 현상은 세계 제 1,2차 대전이 일어나기 전후에도 나타났던 현상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저축이 아니라 적절한 소비가 문제를 해결하기 때문에 각국은 화폐의 조절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다.

종교는 무엇이 넘치고 무엇이 모자라는데 따라서 성장과 쇠퇴가 일어나는지를 알아야 문제를 해결한다. 교화단이 문제가 아니고 행사가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행사가 하나 지나면 후유증이 더 큰 상황을 보아내야 한다. 교화의 정체를 일으키는 원인은 무조건 사람임은 틀림 없다. 그런데 우리의 어떤 구조가 사람들에게 일하지 않게 하고 헌신하지 않게 하는가를 찾아야 한다. 사람들에게 매력이 없는 교화인으로 만들어 내고 사람들에게 다가서지 않는 교화자를 양산하고 사람들에게 의욕을 일으키지 못하게 하는 어떤 구조는 없는지 우리의 공화주의 제도의 운용에 문제는 없는지를 찾아 볼 필요가 있다. 교화는 대승으로 하되 수행은 소승으로 해야 하고 교단은 덕을 일으키되 조직은 법으로 가야 하며, 재가 출가가 모두 화합을 우선으로 하되 그 노력은 철저하게 하도록 하고 책임을 지게 하는 제도가 있어야 할 것이다. 이제 우리도 구조주의적 입장에서 교화에 대한 답을 찾아보면 어떨까?

<정관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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