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숨결 〈정전〉

진화를 거듭하고 있는가?
영적 의미의 삶 아니면 성직이라도 의미없어


이 경문만 남아 있으면 우리 회상을 다시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 일원상 서원문이다. 이 내용 가운데 '진급이 되고 은혜는 …(중략)… 일원의 위력을 얻도록까지 서원하고 일원의 체성에 합하도록까지 서원함'은 가장 핵심을 이룬다. 즉 삶의 의미가 진급에 있고 그 진급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 나눔에 따른 은혜다. 그리고 진급의 극치는 일원의 체성이고 은혜의 극치는 일원의 위력이란다.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은 동물이나 사람이나 모두 잘먹고 편안하게 살다 죽는 것에 지나지 않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먹고 살기에 급급한 사람, 조금 더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살고자 하는 사람,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려는 사람, 자기의 재능이나 재력 또는 육체적 봉사로 여력이 닿는 데까지 어려운 사람을 돕거나 세상 발전에 기여하고 싶은 사람도 있다. 하지만 어느 것이 더 낫다고 하기 어렵다. 먹고 사는게 힘든 것이 게으름을 피워서 그렇게 된 게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주변 여건에서 그리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은 물질적 풍요로써 삶의 가치를 척도로 삼는 게 아니라 삶에 대한 자세가 어떤가에 기본적 가치가 있음을 본질적이라 여기는 데 있다.

주어진 여건에서의 삶에 대한 노력이 인간으로 살아가는 기본적 의미라면, 진리적으로 삶의 의미에 깨어있는 마음이라야 본질적 가치를 지닌다. 삶의 느낌을 넘어 영적인 고뇌를 한다는 것은 깨달음의 혼을 지닌 인간으로의 가치가 드러나는 모습이다. 영적 의미의 삶이 아니라면 전무출신이니 성직이니 하여도 별 의미 없다. 삶의 한 단면에 지나지 않을 따름이다.

아직도 세상에는 사회적 명분의 탈을 쓰면 자신마저 자신을 괜찮은 사람처럼 여긴다. 반대로 명분이 없으면 삶의 낙오자처럼 여긴 나머지 실의에 잠겨 몸부림 친다. 너도나도 이런 명분을 뒤집어 쓰려고 그렇게 노력하여 그 자리에 들었다해도 삶의 질에 맞닥뜨리면 동물에 지나지 않는 고뇌와 다를 게 없음을 이내 깨달을 수밖에 없는데 말이다. '그토록 노력해서 얻은 삶이 겨우 이런 삶인가!'하고 회의를 느낄 때는 이미 인생의 해가 저만치 저물어가고 있는 때다.

물질적 풍요나 깨어난 느낌으로 삶을 감상하는 게 삶의 궁극적 본질이 아니다. 어떤 삶이든 그 속에서 영적으로 깨어있어 영적인 진화를 거듭하고 있느냐가 인간으로 살아가는 지상 최대의 과제다.

진화의 끝은 진리와 하나가 되어 진리의 마음으로 언어와 행동하여 진리의 삶이 되는 것이지만, 삶이란 진행형이라 인간으로 태어나 영적으로 진급이 되었음을 느낄 정도라면 만족하고 감사해야 할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면 나머지 인생은 덤이라 생각하고 도의 즐거움으로 여유롭게 뚜벅뚜벅 살아가도 괜찮지 않나 싶다. 그래서 진급이란 말이 더욱 정겹고 삶의 리듬을 여유롭게 한다.

<성주삼동연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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