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의 어머니가 젊은 나이임에도 폐암말기로 요양병원에 있다는 이야기가 여러 사람과 함께 식사를 하는 도중 나오게 되었다.

그 식사 자리에는 60대, 40대, 30대, 10대, 5세까지 다양한 연령층의 사람들이 함께 있었는데, 문득 과연 여기서 요양병원이 아닌 곳에서 생을 마감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찬찬히 생각해보니, 나를 포함하여 그 자리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요양병원에서 생을 마감할 확률이 높다는 현실적인 결론을 맞닥뜨리게 되었다. 어디 그 식사 자리의 사람들뿐이랴. 요즘은 요양병원이나 요양원 등의 시설에서 생의 마지막을 준비하고 맞이하는 것이 보편화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요양병원에서 생을 마감하는 것을 소망하느냐고 물으면 상당히 다른 답이 나올 것이라 예상되었지만, 현실이 그렇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 자신이 요양병원에서 죽을 것을 상상해보니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라는 물음이 더욱 절실하게 다가왔다. 극단적으로 생각을 몰아가서, 산부인과병원에서 태어나서 요양병원에서 죽는 사이가 일생이라면, 모두가 이렇게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는 이유가 참으로 궁금하다는 생각에까지 미치게 된 것이다.

이는 마치, 작은 배를 넓은 바다에 홀로 띄우고 항해를 시작하여 매일매일 죽을 고비를 넘겨가며 거친 파도를 열심히 헤쳐나가기는 하나 이 항해가 왜 시작되었고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 것과 같아서, 고되기는 하나 허망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라 하겠다.

대종사께서는 생사가 일이 크다 했는데, 큰 일은 해결을 못 하고 눈 앞의 작은 일에만 하루하루를 쓰다 보니 무언지 모를 허무함이 우리의 마음 속에 있을 수 밖에는 없는 것이다. 빛의 속성을 알기 위해서는 밝음과 어두움을 모두 알아야 하듯이 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생과 사를 모두 알아야 편협하지 않은 생각을 가질 수 있다.

또한, 사람 몸 받고 부처님 법 만난 이 생애가 아니면 어려운 것이 생사문제 해결임을 생각하면, 더욱 절실히 이 생애에 생사를 공부해야 함을 느끼게 된다. 이것이 우리가 생사문제 해결에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이다.

사실 생사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생사의 자유를 얻는 것이다. 항해의 종착지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어떤 보물이나 신대륙이 아니라 우리가 그 종착지와 바다를 자유로이 오갈 수 있는 힘 그것인 것이다.

좀 더 시각을 넓혀 사회 전체를 보더라도,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사회를 좀 더 나은 곳으로 바꾸기 위해서 살아있는 동안에 무엇을 할 것인가에만 집중하는 것보다 전체적으로 생과 사에 대한 건전한 인식을 이 사회에 정착시킴으로써 더 근본적이고 많은 변화를 이끌어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욕심, 이기주의, 물질 만능, 대립 등은 죽음이라는 말 앞에서는 그 힘을 잃고 말기 때문이다. 이런 죽음의 속성 때문에 진리는 영생을 한 몸으로 살게 하지 않고, 삶과 죽음이라는 이름으로 현실적인 부분을 리셋(re-set)시키는 장치를 마련해 주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이 리셋장치를 잘 이해하고 활용한다면 살아있는 동안 허망한 것에 시간과 마음을 낭비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진리의 은혜인 것이다.

원불교의 장례식과 천도재를 겪은 많은 사람들이 원불교의 장례 문화를 감탄해마지 않는다. 원불교의 장례문화는 죽음은 흔연한 것이지만 중요한 것이며 슬픈 것인 동시에 아름다운 것이라는 느낌을 자아낸다. 그것은 원불교가 생사문제에 대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가치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아름답고 본질적이며 필수적이고 현대적인 관점을 더 많은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다면 우리 사회에 참으로 많은 도움이 될 텐데 하는 생각을 가져본다.

원불교 천도재 장례문화 겪은 많은 사람들 감탄
생사의 기본적 가치 잘 이해하고 활용해야


<강남교당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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