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는 학명 선사가 글 한 수를 지어 보내기를 '투천산절정(透天山絶頂)이여 귀해수성파(歸海水成波)로다 불각회신로(不覺回身路)하여 석두의작가(石頭倚作家)로다'라 한지라, 대종사 화답하여 보내시기를 '절정천진수(絶頂天眞秀)요 대해천진파(大海天眞波)로다 부각회신로(復覺回身路)하니 고로석두가(高露石頭家)로다'라 하시니라.

하늘을 뚫는 높은 산 봉우리여, 바다에 돌아가매 물이 물결을 이루리로다.
몸 돌이킬 길을 깨닫지 못하여, 돌머리에 의지하여 집을 지었더라.
높은 산 봉우리도 천진으로 솟았고, 큰 바다도 천진으로 일어나는 물결이니라.
다시 몸 돌이킬 길을 생각하니, 높이 돌머리 집이 드러났도다.

대종사 봉래정사에 계실 때에 학명선사가 와서 "선생 같으신 도덕으로 어찌 세상에 포양할 뜻을 두지 아니하시고 이같은 심산궁곡에 처하사 수간모옥의 생활을 하시나이까?"하고 가더니 위와 같은 글 한수를 지어 보냈다는 내용이 〈대종사 수필법문〉에 있다.

학명선사의 눈에 분명 당신보다 지량과 국량이 한 수 위인 대종사인데, 세상에 나아가지 않고 심산궁곡에 거처함을 안타깝게 생각하며 자신의 심경을 적어 보냈다는 느낌이다. 또한 그러한 선사의 순수한 마음을 알고 서당도 중도하차한 대종사께서 글자 몇 개 섞었을 뿐인데 우리의 감성을 압도하는 빼어난 글로 답을 했다. 한시를 잘 모르지만 천진한 대자연의 세계가 기운으로 전해오는 기감(氣感)만큼은 글이 길어서만 감동을 주는 것이 아님을 충분히 느끼게 한다.

문답의 핵심은 '불각회신로'와 '부각회신로'에 있다. 학명선사는 대종사께서 몸 돌이킬 길을 알지 못한다고 보았고, 대종사는 몸 돌이킬 길을 알고 있다고 답했다. 이는 지량의 차이다. 학명선사도 당대 내노라는 선승이었지만 주세불의 책임을 맡고 나온 대종사가 얼마나 큰 깨달음을 얻었는지, 어느 정도의 혜안을 갖고 중생제도의 그물을 짜고 있는지가 보이지가 않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종사는 그 걱정하는 성의를 받아주며 친절하게 답장까지 하는 예를 갖췄다.

겨우 진공자리 가늠하는 선지식과 진공묘유를 겸한 백정식(白淨識)의 단계에 있는 진공묘유덩어리인 큰 스승의 차이를 보며 갑자기 외경을 넘어선 두려움이 엄습한다. 나는 어디에 있는가. 열심히 잘해보려 하는 것이, 교단에 오염수를 뿌리고 있지는 않는지. 완벽 그 자체인 교법을 날 넘는 사량으로 입으로만 가르치지 않는지 돌아보게 된다.

대종사와 학명선사 문답은 지량의 차이
문답의 핵심은 '불각회신로'와 '부각회신로'에 있어


<기흥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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