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명정대한 심법으로

정산종사의 차녀로 태어나 어려서 부터 소태산대종사를 비롯한 선진들의 관심과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자란 행운아. 청아한 인품과 공명정대한 심법으로 교화현장과 교단의 요직을 수행하며 공도의 주인이 되어 대인의 삶을 살다간 태타원 송순봉(台陀圓 宋順鳳,1934~2013) 종사.

그는 근원성지인 영광에서 태어났다. 공가와 사가의 구분을 떠나 대중과 함께 살다보니 자연스레 어른들을 본받아 어려서부터 진리에 대조하는 생활을 했다. 또한 천품이 순수하고 온유하고 꾸미는 말이나 행동을 하지 않는 올 곧은 취사를 했다. 원기29년에 어머니의 연원으로 입교하여 '순봉'이란 법명을 받았다. 초등학교를 마치고 부산으로 유학해 경남여중·고를 졸업했다. 원기38년에 언니 뒤를 따라 전무출신을 서원했다.

원기42년 교화부를 시작으로 교역에 임했다. 원기46년 정산종사의 환후가 깊어지자 간병에 참여했으나 원기47년 정산종사가 열반했다. 부친의 열반에 따른 허무감을 통감하고 생사에 대한 연마에 몰두하는 계기가 됐다. 이후 정화사에 근무하며 〈원불교교전〉 인쇄와 교서발행에 전심전력을 다하던 중에 건강이 악화되자 생사연마의 공부가 깊어져 심신간 진리를 체득하는 기회가 됐다.

한번은 정산종사께 대인이 되는 공부법을 받들었다. "누구나 대인이 될 소질이 없지 않나니, 마음을 키우고 국을 넓혀서 대인되는 공부를 부지런히 하라. 몸은 작아도 마음이 크면 대인이요, 몸은 커도 마음이 작으면 소인이니라. 대인되는 공부의 요령은 만사종관(萬事從寬)이니라" 〈정산종사법어〉 유촉편 29장. 그는 이 법문을 가슴 깊이 새기며 일생의 표준으로 삼아 새 세상의 주인 되기에 힘썼다.

원기 55년 강경교당을 시작으로 마산·군산·정읍교당 등지에서 활발한 교화활동을 펼쳤다. 특히 군산 교당에서는 합동교리공부와 부지매입 등으로 교도들의 공부심을 진작시키며, 군산교당이 교구청 교당으로서 역할을 할 수 있는 기반을 다졌다. 마산과 군산교당에서의 생활은 인생의 황금기였다. 당시 교도들은 "황금 테가 그의 주위를 감싸고 있는 듯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천상의 불보살 같았다"고 말할 정도였다.

이후 감찰원장, 교육부장, 대구교구장, 원불교 대학원대학교 총장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 감찰원에서는 예방감찰을 통해 교단의 대소사를 미리 대비하는 정책을 펼쳤다. 교육부에서는 거교적으로 '교육발전위원회'를 탄생시켜 교단의 장래를 책임질 후진양성의 토대를 튼튼히 했다. 특히 원기85년 5월에 UN본부에서 열린 세계보편윤리위원회에서 정산종사의 삼동윤리를 세계를 향해 설파하며 "우리는 하나이니 하나로 살자"고 주창했다.

그는 "너희는 내 제자가 아니라 대종사의 제자"라며 인연 있는 후진들의 지도에 모범을 보이며 교단적 인물로, 공적인 인물로 성장하도록 했다. 특히 대의를 세우면서도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공부하고 교화하도록 하는 부드러운 카리스마에 모두가 승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일생을 법맥을 대고 공의를 앞세우며 공도의 주인으로 살았다. 또한 부드러운 성품으로 스승을 지극히 받들며 후진들을 살피고 보듬어 주는 자비보살의 삶이었다.

이처럼 언제 어디서라도 물 흐르듯 여여하고 푸근한 모습으로 즐겁고 기쁘고 보람된 삶을 살다가 사바세계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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