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선이 여쭙기를 "천지 만물의 미생전(未生前)에는 무엇이 체(體)가 되었나이까."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그대가 말하기 전 소식을 묵묵히 반조(返照)하여 보라." 또 여쭙기를 "수행하는 데 견성이 무슨 필요가 있나이까."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국문(國文)에 본문을 아는 것과 같나니라."

말하기 전 소식이란 천지만물과 인간의 근원이 둘이 아닌 하나요, 진리의 체성이 한생각 이전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국문에 본문을 안다는 것은 수행에 있어 무엇을 닦고 버려야하는지, 그 기준을 안다는 것이다. 일상수행의 요법1조에 보면 '심지는 원래 요란함이 없건마는 경계를 따라 있어지나니, 그 요란함을 없게 하는 것으로써 자성의 정을 세우자.'라고 되어 있다. 그러면 '심지는 원래 요란함이 없건마는'을 해석하는 데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성품의 본래면목을 알아 진공의 체성으로 이해하는 경우와 평소 요란함이 있다가 요란함이 없는 일상의 고요한 마음으로 이해하는 경우이다. 어떻게 공부를 하든 꾸준한 대조 자체가 주착된 마음은 분별성으로 낮춰지거나 분별성은 빈 마음으로 돌려진다. 그러나 전자는 시간이 지날수록 천지와 같은 자성의 정을 쌓게 된다. 국문의 본문을 알기 때문에 맞는지 안 맞는지 스스로 점검하는 자성반조가 쉽다. 후자의 경우에는 끊임없이 공부를 하는데 경계따른 대조일 뿐 큰 발전이 어렵다. 국문에 본문을 모르기 때문이다. 공부를 하는 것 같은데 국에 사로잡힌 화분안의 나무일뿐이다. 대산종사는 "견성을 하고 1년 안에 행동이 변하지 않으면 견성하지 않은 것이다"고 밝혔고, 대종사는 "견성을 하지 못하고 법문을 하면 일체가 마설이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공부를 한다는 것은 반드시 공부표준이 있어야 한다. 음식을 만들 때는 음식 만드는 순서와 노하우가 있듯이 그 공부표준이란 교전이나 정전대로 이지만 그 이전에 진리를 깨달은 스승이 기준이 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정전의 내용이 아무리 옳아도 깨달은 사람이 해석을 하는 것과 깨닫지 못한 사람이 해석한 것은 천양지차이다. 우리가 대종경을 배우고 정산종사법어를 배우는 것은 그 깨달음이 대원정각을 이뤘기 때문이다. 그 깨달은 경지에서 나오는 법이 무궁무진하면서도 조리정연하고 어느 것하나 생활에 유익하지 않는 것이 없다.

반면에 법을 설하는 이가 아무리 감동적인 가르침을 준다 할지라도 그 깨달음이 스승과 같지 못하다면 법은 얼마든지 다르게, 얕게 전해질 수 있고 시비를 모르고 따르는 사람들로 인해 교단 내 분파를 만드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공가의 법은 주법에 법맥을 대는 것이 중요하며 만성현이 걸었던 기본 심인에 인을 쳐야만 기차가 철로를 벗어나지 않듯이 파수공행을 할 수 있는 것이다 . 스승의 법을 상하지 않게 하며 함께 원만하게 나아가는 인증 샷, 그것이 견성이다.

<기흥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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